전이된 mobility개념을 위한 가설적 공간계획.

1. 도시의 mobility에 관한 생태학의 규정.

2. 공간에 대한 제한된 규정.

3. 착란의 도시 속에서

4. <가설적 구성계획을 고려한 입지로서의 인간>

5. 전이된 mobility개념

1. 도시의 mobility에 관한 생태학의 규정.

사회학자와 생태학자, 그리고 건축가와 예술가들은 ‘도시’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여러 직간접적인 형태로 논쟁해오면서 그들이 다루고자 하는 개념들의 단위적 근거가 될 수 있는 인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과 관계를 정립해 왔다. Urbanism(도시학)이란 영역이 실질적으론 도시행정과 건축이론과의 연계를 위한 규칙들을 마련하기 위한 형태로 유지되었거나, 사회학이나 생태학의 통계적 근거를 보완하기 위한 경향과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는 하나, 그 단어 자체가 지닌 실천적이고 적용가능한 주제를 자각시키는 힘은 그것이 다루고 있는 것, 즉 ‘도시’ 자체라는 모든 행동과 움직임들을 포함하면서, 하위구조(infrastructure, 사회복지시설 및 기반시설 모두를 지칭하는)와 추상적 권력체계, 두가지 모두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의미구조체를 설명하기 위한 유일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이점은 곧, 도시학은 인간과 공간에 대한 가장 거시적인 설명을 위한 것이며, 인간, 공간 두 키워드를 가지고 행해지는 모든 문화활동에 대해서 그 의미형성의 일부 책임을 져야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R.E.Park와 E.W.Burges 등에 의해 진행된 고전생태학이 비판받았던 점은 그것이 곧 지나치게 집단 간의 경쟁과 이해관계내에서만 도시를 설명하려 하였으며, 생물적 수준과 문화적 수준사이에서 동기화되는 단계를 구별해내지 못하고 인간의 행동양식을 설명하였다는 점이며, 또한 실제 물리적인 공간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지나치게 지각과 인식의 영역을 소홀히 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Louis wirth의 1938년 저서 ‘생활양식으로서의 도시화’에서 고전생태학의 한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집단내에서의 행동양식과 변화들, 그리고 그것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인구규모, 인규밀도, 인구의 이질성, 이 세가지 요소로 관련되어지는 점을 설명함으로써 생물학적 범주 내에서 사회화를 설명했던 기존 고전생태학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도시에 대한 사회학적 견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건축의 본질적 측면인 공간 자체를 담론화하지 못하고 그저 사건이 일어나는 위치적 관점에서만 지적하고 있다. 이전 urban morphology(도시형태학)이란 이름으로 건축물들의 구조와 형태 기능과 그 역사성과 전통성의 연관성을 기반으로 도시를 분석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단지 비교연구학의 입장에서 차이점만을 설명하여 기존 고전생태학에 접목시키는 형태로만 행해졌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80년대를 넘어서면서 하위구조가 그 규모가 커지고 기능적으로 다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도시구조가 새로운 형태의 세분화된 상업지구단위로 구획되고 확정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문화적 동기에 의한 활동양식과 범위의 형태가 여러 가지로 모형화된 이론으로 설명됨으로써 생태학은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지만, 여전히 공간담론에 대한 가능성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통계와 심리적 현상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기반으로 한 사회의 유형화와 도시구조의 유형화는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인간의 공간 지각계에 대한 생략과 단순화에 따른 손실을 감수해야하지만, 분석의 결과물들이 다시 실체로서의 건물과 장소, 그 안에서의 인간의 복잡한 동선과 행위들로 소급될 경우엔 사실상 어떤 장소와 어떤 점유자가 어떤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는지, 건물과 건물사이의 공간은 어떠한 차이를 내포하는지, 입찰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어떤 경제적 필연성 혹은 어떤 계승을 위한 기준들에 의해 야기되는지에 대해서 설득력있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mobility에 관한 생태학이나 사회학의 입장은 경제적 지향에 따른 정주와 이주, 혹은 최근 관심이 집중된 유목민의 패턴에서 끌어낸 도시정립단계의 모호성을 주요한 이슈로 삼고 있지만, 최근 Urbanism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mobility의 개념은 세계화와 네트워크의 방대한 혜택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이후, 극심한 경제공황을 거치면서 이젠 경제와 관련된 경쟁과 위상관계의 문제가 아닌 도시 전체를 하나의 유동체로 인식하고자하는 미시적 차원의 재해석과 연계되어 있다. 모바일폰, 랩탑컴퓨터, 텔레마틱스, PDA 등에 의해 세계화, 이동화된 경제는 대도시의 상징화된 자의식적 모델로 제시되며, 면밀하게 계획된 하위구조들과 지하와 지상의 모든 통신망들을 통한 이동들은 마치 그 도시 자체를 통해 저변으로 순환하는 유동체의 에너지(FLUX)로 간주되고 있지만, 그것은 대도시가 스스로 지각되지 못하고 철저히 조직되고 생산된 유동체로서 도시의 생태적 지형에 시행된 거대한 토목공사 위에 건설된 통합형 홈네트워킹모델로 고정되고 경제와 사회적 위상관계에 의해서만 공간과 인간활동의 의미가 결정되고 있는 곳일 뿐이다.

정지와 움직임의 상태에 대한 오래된 관념은 건축에 있어 변형과 사건의 발생을 야기하는 가장 기초적 동기였지만, 과도하게 복잡화되고 다양화된 공간과 장소의 의미들은 발생하는 변형과 사건들을 그 구식의 관념 하에서만 인식하고 설명함으로써 건축의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생명력있는 동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테크놀러지와 그 구조망의 복잡성의 환상에 빠져들었다. 점점 복잡화되고 다양화되는 설계도면과 재료의 목록들은 메트로폴리스를 위한 단위들의 생성이 아니라 고전생태학자들이 인간의 생태로 믿은 경쟁과 위상-사실은 인간의 지향과 적응인-에 부합하기 위한 메카닉을 형성하는 단위들이다.

도시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실재의 flux를 감지하기 위해선 도시 안의 mobility의 실체를 파악하고 - 즉 모든 모바일 툴들과 함께 움직이는 인간의 동선과 그 정보교류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지각되는 과정과 그 사건들의 중첩, 물리적 실체로서의 공간의 비가시적 실체의 수용과정을 파악하고, 그 flux의 가장 기초적 단위인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글은 도시의 mobility와 flux에 대한 생태학적 관점을 넘어서 실체로서 지각가능한 물리적 공간으로 유도된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공간에 대한 몇몇 규정과 함께, 그 공간이 사회적 소통과 단절의 범주에서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공간에 대한 제한된 규정.

만약에 한정된 높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그 한정된 높이 하에서의 규정들과 한정되지 못한 그 위의 공간, 즉 계측가능성을 넘어선 높이라는 것에서의 규정들이 대립되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지각능력을 벗어난 이 대치상황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통계의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확인불가능함에 대한 계측과 한정됨에 대한 자기해명의 암묵적 공식화는 어떠한 엄밀함의 위상도 무시하면서 가시적인 객관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기능적 요건충족이라는 제한된 위치를 부여받지만 대치된 상황, 즉 힘들의 분출 이전 상태의 긴장과 자극에 이르게 되면 통계는 인본주의적 요구를 수용한 운명적 조건으로 충족되게 된다. 곳곳에 내포된 인본주의적 요구는 결국 긍정성과 함께 부정성을 내포하지만 이미 진행된 도출과정을 따라 합당한 결과에 이른다. 그리고 근거라는 것은 출처를 상실한 인용으로써, 또한 인용된 형태로만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나타난다. 0-1000피트의 질서와 1000-∞의 질서는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한 것들이지만 우리의 지각능력은 이것을 한정하면서 모든 논리의 틀속으로 조직화한다. 아무도 이런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또한 모순을 증명한 합당한 논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지속되는 임의적 한정과 그 질서화는 한정과 그 이외의 것들 사이의 모든질서를 포함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공간에 대한 일반적 관점이다. 이제 1000피트의 높이는 그 무엇에 의해서든 비행기를 타고 올라간 사람의 지각에 의해서든, 확인된 기류의 흐름에 의해서든, 아니면 별자리를 찾는 어린아이의 동심에 의해서든 누구든지 원하면 가능한 인식의 틀속에 자리잡게 된다. “난 지금 1000피트의 높이에 있다. 그러므로 이제 1000피트 사이의 공간은 논리화될 수 있다.”

만약에 두개의 물리적 면들이 존재하여서 이것이 접합과 절단의 과정을 반복한다면, 그 면들에 의해서 두개의 공간이 접합과 절단의 과정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두개의 공간 중 어느 한 곳에 위치한 누군가는 그 면들의 접합과 절단을 보면서 생성되는 두개의 공간과 소멸되어 나타나는 한개의 공간 속을 반복하여 움직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두개의 면은 한개의 정의되지 못한 공간을 두개로 분열시킴으로써 한가지 측면에선 질서화를 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가지 측면이란 좌표적 위치 즉, 고정된 자기인식적 위치의 관념에 이중적 행보인 인식가능한 자기입지능력을 부여한다. 다시말해 단순한 좌표의 관념에 입지(어느 공간에 의미를 형성하면서 점유하게 되는 현상)을 가능케하는 실현불가능한 지각의 오류를 심어준다. 이것이 실현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상 자기한정과 자기비유(두개의 면들과 대면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연출하는 의미로 또한 완벽하게 물리적인 인식이 불가능한 인간의 특성과 관계해서)라는 모순적 상황 하에서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두개의 눈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정한 돌연변이 찬미자들처럼.

이제 지각불가능한 공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공간이란 인식을 심어주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공간의 인식을 반성하면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모색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과연 필요한 것인가. 우리가 행하는 모순적 지각들은 항상 반전의 기회를 엿보는 연출된 상황의 배우들처럼 분열된 정신을 간직한 채 지속되는 극화된 상홍을 위해서 이용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공간은 과연 유동적으로 우리의 의도를 따라와 줄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가 행할 의도적 조작을 용인할 수 있을만한 공간 자체의 확장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인가. 행할 의도적 조작이란 모든 부정적 현상과 착란적인 가치들을 수렴할 중립적 가치의 창출을 위한 지각능력의 분절과 그 요소들의 인위적 재배치일 것이지만, 여전히 가치론적인 이 환영을 온전히 공간 속에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착란적 발상을 절대엄밀한 공간 안에 용인될 수 있을 장치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윤리적 의무감으로 되돌아가는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 것인가.

3. 착란의 도시 속에서

첫 번째 착란.

구획된 건물을 바라보면서 구획된 믿음들을 관찰한다. 모든 한정된 공간 속에서 관찰되는 것들은 경계에 대한 암묵적 용인과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자신이다. 모순적인 엄밀히 용인될 수는 없지만, 정확히 구획된 공간개념에서 모순이란 건 언제나 발생될 수 있는 믿음들의 교차행위이다. 파악되지 못하는 것들을 향한 애정으로서의 교차는 의식 속에서 언제나 혼란을 야기시키지만, 여전히 구획 속에 존재하는 믿음은 객관적으로 양분되지 못하며 언제까지라도 임의적인 상황에 놓여있고 싶어한다. 정확히 몇분 몇초에 자신이 존재했던 그 공간을 이젠 다른 곳에서 발견해서 각인시키는 행위는 입지와 구획, 그 개념적으로만 설명가능한 두 용어를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감성적 회상이며, 노스텔지아적 환상이다. 언제나 고정된 이 구역과 저 구역은 가장 인상적인 갈라짐이란 형태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그 의미란 모든 우연적인 느낌과 감성의 표현은 절대 우연적이고 의도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계획과 전략에 의해 예전부터 의식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며 공간에 들어서고 있는 당신은 이미 존재하는 계획속에서 일부를 실행하는 도면속의 기호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인상적인 갈라짐은 저 아득한 공간을 가로지르며 미궁의 우연 속을 구획한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가시적인 모든 것이 비우연적이라 하더라도 분열된 것으로서의 공간은 이미 그 갈라짐을 통해 모든 구획된 우연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철저히 기계적인 반응만으로 살아갈지라도 모든 계획 속에 놓여진 일상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어느 곳에서라도 환상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그 누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공간과 그 인식의 틀은 어떠한 가능성도 소진시킨 채 주어지는 물리적 해석능력을 소화하기 위해 공간을 구획하고 있다. 건축가들에게서도 선험자(영적속성의 망상자)들에게서도 선행자(전점유자)들에게서도 주어지지 않는 오직 자의적인 해석능력, 속성을 말소시킨 구획능력, 정확한 분배를 위한 인본주의, 그리고 경계를 넘어서는 자신과 대면하는 상상력, 이 알 수 없는 착란의 상황.

두 번째 착란

관계 속에서의 인용과 비유와 약속과 고백을 실천하면서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도시를 헤매고 있는 믿음을 관찰한다.

1. 인 용

언제나 당연히 그 근거의 불충분함과 임의적인 시간성의 확보를 가정한다해도, 당연히 둘 사이의 모호함과 단기적인 목적지향적 규범을 가정한다해도, 인용의 그 행위 자체로서의 의미는 무관심에 관한 암묵적 동의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철저히 정해진 틀에 의해 진해오디는 괄호치기와 강조, 단락화와 종결화와 같은 행위는 이후에 형성되는 목적을 위해 재해석과 재배치의 여유로움을 요구하는데, 그러나 인용함과 관계된 서술과 이해의 상황 하에서 그러한 행위들은 가장 심한 오류의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상황의 기반이 되는 조건에 대한 무관심과 인용 자체에 대한 무관심,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까지 가능한 한 모든 축적된 열외적 상황을 요구한다. 기억과 관계맺은 지각의 논리 중 일부로써 인용은 이러한 이유로 공간 안에선 적어도 자율적이며 유동적인 힘의 논리를 형성한다. 거기엔 어떠한 주체도 의도도 없으며 즉각적으로 형성된 공간과의 조우상황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입지 안에서 유일한 가시적인 외부흔적을 남기면서 단절된 공간을 형성케하는 것은 인용뿐이다.

2. 비유

그러나 한정된 자각 속의 지각은 단지 고정되고 자율적인 힘의 논리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이해될 수 없다. 놀라운 것은 인용의 과정과 그 면밀한 계획은 그것이 발생됨으로써 또는 놓여짐으로써 다방향으로 분열된다는 사실이며 관계 속에서의 요소들의 섭취는 모두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어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생성의 문제는 선택 이전, 그보다는 좀 더 자발적인 문제 안에 놓여있다. 물리적 환경이 엄밀하게 무미건조하면서 철저한 규제의 논리속에 존재할 지라도, 우리의 행보가 도면속의 동선과 비율에 따라 기능적 효용성과 예지적 반응 사이를 방황할지라도 결과론적으로 우리의 의도와 산물은 일치하지 않는다. 불일치의 문제의 본거지는 불분명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각의 공간 속이든 원형의 공간 속이든 그것이 경험되고 지속되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자족적인 변형과 변색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불일치의 속성이 내포하는 시간적 단절과 의미맥락의 단절에 좌우되며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미 이 문제를 충분히 경험했고 숙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생존의 문제 안에서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3. 약속과 고백.

최후의 결백성은 우리가 희망하듯이 언제나 홀로 있는 인간으로서의 공간 밑에서 주어진다. 절단, 침묵, 환희, 백열. 정해진 순서처럼 공간 속의 믿음들은 하나씩 그 형체들을 찾아가며 소진되어간다. 그러나 그 희망은 성급하게 이미 실현되어 버렸으며, ‘향유’의 문화로서, ‘용인’의 문화로서, ‘반전’의 문화로서 모든 부족한 믿음들을 채워나가고자 한다. 지속됨에 관한 약속, 약속행위의 반영으로서 지속, 경험을 위한 결계와 같은 인위적 설정과 그것의 반영체로서의 임무를 받드는 도시, 그 모든 것을 실토하며 개선을 모색하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다시 무언가에게 대안을 받아내야 되는 이 도시.

세 번째 착란.

대안에 대한 희망은 즉결심판에 넘어간다. 실천의 윤리에 의거해 지각된 관계항들을 수렴한 생성원칙들은 적절히 구획되며, 모순된 파계항들을 수렴한 침묵의 원칙들은 적절히 변형된다. 공간에 관해 한가지 믿음을 가진 자는 그 공간에 대해 한가지 실행력을 지닌다. 그러나 두가지 믿음을 가진자는 한가지의 분열증을 얻게 된다. 고정입지를 취득하지 못한 것과 고전적 표상을 취득하지 못한 것, 즉 대안적 상황을 제시하는 중계인이 되지 못하고 대안적 공간을 모뉴멘탈적 인지 하에 그려넣지를 못하는 것 사이에서 발생된 분열증은 이 도시를 떠돈다. 도시 내의 영역과 기능, 소외와 밀집의 관계들 곳곳에 분열증적 경험과 그 자세들이 존재하며 이미 그것은 해결가능성을 넘어선 착락의 상황에 이르렀다. 실천에 관한 착란적 과장, 결백함에 관한 착란적 결정.

4. <가설적 구성계획을 고려한 입지로서의 인간>

(Anyone시리즈 중 Anywhere 4. 공간의 논리. 현대건축사 1998) 중 p70~87

Shunsaku Arakawa(화가, 뉴욕주재), Madeline Gins(시인, 뉴욕주재)

두 예술가에 의해 마련된 이 공간계획은 실현불가능한 영역 속에서 가능한 모든 자율성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신체에 철저히 제한받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그들의 자율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려는 공간개념은 이미 경험적 단계에 못미치는 그 이전의 잠재적인 머뭇거림의 상황에서 요소들을 구성하려는 제한받는 지각적 인간 안에서 형성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기획은 공간에 관한 모든 술어들과 명령어들을 생략하고 어느 곳에서나 시작할 수 있고, 어느 곳과도 연결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용인될 수 있는 공간구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장소가 아닌 존재로서 분류되고 입지는 존재가 아닌 장소로서 여겨져야 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지각행위 내부와 시=공으로 알려진 지각 속의 열린방안에서, 더욱 궁극적으로는 단일한 영역 혹은 범주의 내부, 즉 인간을 입지로서 생각하는 것이 곤란하게 하는 언어의 표준적 범주를 형성하는 내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의 상황은 주체를 포함한 위상관계로 정해지고 공간연출은 엄밀히 의도적, 혹은 수공적 운명을 가진 존재의 활동으로서 제한된다. 이것은 결국 논거화의 길, 즉 이해가능함속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연적 가정을 거치면서 사실화되었다.

“과연 인간의 신체는 클까? 크다면 얼마나 큰 것인가? 어디서 인간이 끝나고 세계가 시작되는 것인가?.. 인간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한 많은 개념들은 대부분 치환의 프로세스에 의해 형성되었다. 어떤 언설에서는 보다 광의적인 술어가 협의의 술어로 치환되었고, 반대의 상황도 연출되었다. 그러나 확정요인으로서의 존재가 발생하는 입지 그 자체를 간과한다면 어떻게 있어야 할것과 제외되어야 할 것을 결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많은 개념들의 형성을 위한 입지는 여전히 존재할 수가 없다. 그들의 시도는 형성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니지만 입지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애매모호한 입지’로서의 잠재적 상황이다.

“임의의 개인에게 얼마만한 양의 시=공이 소속되어 있는 가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초의 시=공으로부터 비결정적인 채로 남아있다. 지각이라는 사건에 있어 생각해야될 것이 개인의 수명에서인지 종의 수명에서인지조차도 불분명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부적으로 한정된 영역내에서의 지각발생의 일반적 입지’를 고안해내고자 한다. 그들이 이를 통해 확보하고 유도해내고자 하는 것은 자연발생적 프로세스 안에서 지각의 주체의 동시발생적 생성이다.

입지(site)에 대한 희미한 정의

“1624년의 정의 sited-그가 그를 육체적으로 거기에 존재시키고 있을 때 그 이외 어딘가에 있는 그를 향해 그는 무엇을 말해야 할것인가

1675년의 정의 site-육체란 마땅한 부위에 적절한 순서로 결집된 모든 부분으로부터 결과한 것

1961년의 정의 site-우리가 육체인 상태의 편의함“

결국 우리는 입지의 행위 안에서 무엇이 통합되어진 상태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변별되어진 상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이 타당성에 의해 배치되든 kc이에 의해 배치되든 어차피 모든 계획성 내에 존재하는 입지는 그렇기 때문에 파열과 부조화를 내포하면서 그 자신을 구획하는 자연발생성을 가진다는 것이 생성으로서의 입지 또는 변형으로서의 입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모든 장소가 절-합이다... 사고행위가 어떤 사물로부터 충격을 받자마자 새로운 거리가 분리되고 전과는 다른 누군가가 사고에 접합될 수 있을지도모르며... 유아는 매체로서 또 그 자체로서도 절=합을 진행한다. 이미지도식으로 알려져 있는 조직원리는 유아들이 실시하는 세계확보의 이 작업을 안내, 지도한다. 이러한 원리는 추상적 명제도 아니며 구체적 이미지도 아니다. 반복적 패턴을 통해서 유아는 자기를 형성하며 세계를 이미지화해간다. 이미지 도식은 비명제적인 형태로 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

도처의 모든 것은 절=합을 통해 다른것과 절=합하면서 관계하며 그 형태를 확장시켜나간다. 매체 속에서의 절=합, 절=합에 의한 매체 속으로의 편입은 원시적인 시기야서부터 진행된 자기인지의 활동임은 분명하지만, 단지 조직원리 내의 절=합 관계형성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입지에 관한 정의 조차도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줄 수 없으며, 절의 상태, 합의 상태를 동시에 대면하면서 자아를 대면하는 유아에게 입지의 의미는 형성되지 않는다. 이미지 도식 내에서 유아는 결국 ‘확정도 언명도 되지 않는 입지’만을 대면하게 된다.

“일단 매력이 대상물이나 사건 혹은 그 쌍방에 대해 완전히 고정되고 관련된다면 매력을 가능한 한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다. 유아가 무엇에 유혹되면 유아는 자신을 유혹하는 것마저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길 바라면서 자기자신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곤 상당한 되밀림을 경험할 것이다. 유아는 그만큼 또다시 되밀 것이다.”

그러므로 영역 내에서 고정입지=대상물은 좌표의 개념을 넘어설 수 있는 활동력을 가진다. 이것은 주체 내의 자의적인 의지와는 상관없는 현상 자체로서의 입지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환영과 고정입지 사이의 차이와 발생 상의 다른 맥락이란 것은, 결국 한 입지내의 절=합, 혹은 시=공 상의 변화들만 포착되는 사건으로만 남아있게 된다.

팔이 떨어져 나간 신체와 팔만 보이는 공간,

“환영지는 상상적 시각고정입지의 통합과 결합하는 연장적 운동감각 고정입지의 통합에 의해 형성될 수 있지만, 시각고정입지의 통합이 관여하지 않는 한, 환영지는 실재이기는 하지만 마비된 팔과 한쌍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례는 세계가 단순히 이미지되어 있음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분리할 수 있는 지각 및 상상 속 고정입지의 통합에 의해 편재적 입지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직접적 증거를 제공해준다.”

팔이 떨어져나간 사람은 잠시동안 그 팔의 존재가 연장되어 남아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연장적 운동감각 고정입지는 이렇게 소위 착감을 만들어내는 기초가 되어 지지만 시각고정입지를 필요로 하지만 그 분명한 고정입지의 작용은 반드시 가시적인 형태, 지각가능한 형태의 영역 속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나중에 설명한 것처럼 기묘하게도 실제로 환영지에서 상상적 고정입지는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연장적 운동감각에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는 오히려 환영지라기보다는 지성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없는 팔은 언젠가는 부재로서 인식되며 환영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환영지가 완전히 소멸하는 일은 없다. 실은 사라져버린 것 같이 보여도 수십년 후에 다시 되돌아 올 때가 있다... 주변에 대해 중심 전체가 살아남는다면 중심은 부가와 조정과 개량을 시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실제로 운동 중심 및 그 주변에서 방의 중심과 그 주변으로 이행하려면 대규모적인 전이를 진행시켜야하며 또 그 공간에서 도시의 중심과 그 주변으로 나아가서는 우주의 중심과 그 주변으로 이행하려면 막대한 전이가 필요하다. 이후 중심은 공제해도 상관없다.”

결국 문제는 전이로 수렴되며 전이가능성만이 의무로 남아있게 된다. 이를 위해 그들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네 방향으로 양분된 분열된 자아들을 공간 속에 배치하여 입지를 형성하고자 한다. 이는 운동감각적 말단에 기반을 둔 다른 존재질서를 포함하는 분열된 자아들이며, 가장 기초적인 물리적 해결능력과 동시에 유일한 전이가능성을 근거로 하는 도시속의 착란적 상황을 내포한다. 운동감각적 말단 속에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것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것이다. 즉, 실제로 걷고 실제로 보고 실제로 연장하면서 실제로 감각을 자극시키면서 실제로 물리적 공격을 가하면서 힘의 논리화를 피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간의 입지를 지배하는 원시적 형태의 감각체로서 분열된 채로 점유하는 것이다.

5. 전이된 mobility개념

이들이 제시하는 상상적 촉각고정입지와 상상적 운동감각고정입지, 상상적 시각고정입지들은 비록 가정된 입지상황이고, 정당화하기 위해선 환영화된 공간을 위한 환영지가 전제되지만, 고정입지, 즉 공간의 점유에 대한 확고한 형태의 지향과 행위를 적어도 확보한 형태의 가설입지로서 이 고정입지는 제한되고 구획된 공간 안의 인간이 지닌 감각에 대해서 확장가능한 발단을 마련해준다. 다시말해서 적어도 환영지에 의한 외부상황과의 조우가 마련해준 행동동기가 확고한 점유형태를 유지하는 인간에게 그 점유를 유지하면서 경계를 벗어나게 해준다면 고정입지 자체는 이제 그 입지를 가지고 유동체의 흐름 안으로 이어지면서 구획공간을 벗어나게 된다. 흐름 안에서 계속 존재하는 고정입지는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여전히 환영지를 간직하고 과거의 환영지를 잠시나마 복귀시키면서 -없어진 팔에 대한 연장적 입지형성이 가능하듯이- 다중적 환영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흐름속의 환영지와 고정입지로서 가정되었던 환영지 두가지를. 도시를 구성하고 구획하는 공간 단위들은 루트에 의해 서로 연결된 채 유지된다는 설명은 이제 물리적 형태를 벗어난 중첩된 환영지의 형태로 연결된다는 설명으로 대체되며 그것은 정지와 움직임의 오래된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각말단의 상태와 그것의 시공간적 출현과 소멸의 관념에 의한 것이 되며, 이제 두 공간 사이를 움직이는 개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공간 사이를 떠나 두 공간에 가능한 환영지와 고정입지를 어떤식으로 유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움직임의 정도가 존재할 뿐이다.

도시 안에서의 mobility와 flux에 대한 설명은 이제 단지 힘 혹은 에너지로 대변되는 위상을 쫓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기반으로 한 중첩과 환영, 연장과 믿음에 의해 설명되어진다. 이 상황에선 실제로 단절이나 소외는 전혀 야기되지 않고, 모든 인용과 비유, 연출된 믿음까지 용인될 수 있으며 심판관에 의한 판정조차 불필요해진다. 만약 이 상황에 적응가능하다면 인간이 연출하고 구성할 수 있는 공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받으며 그 곳에서 모든 형태의 점유, 이용, 이주, 소거 등의 활동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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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글쓰기를 위한 예비고찰로서

글쓰기에 대한 니체적 반성과 발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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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것이 다시한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에 가로놓일 것이다”

“너! 위대한 천체여! 만약 너의 빛을 흠뻑 쬐는 자들이 없다면 너는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말은 시작될 ‘문제인식’에 관한 것, 거기에 종속된 어떤 숙명적인 임무, 회의로써 진행되는 질문들과 악의 섞인 비웃음,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오류와 폐단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규약조직... ‘실천’안에서 단계적으로 지위를 차지하는 이러한 사항들과의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말하기, 남기기, 전달하기, 기억시키기의 몇 가지 의식행위와 그 의식을 통해 가치상정의 기회를 찾는 의식에 대해 문제인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가 뜻했던 대로 종교적 현상과 탐구행위와는 다른 문제이며 일상에서의 경험과 인식의 문제와도 또한 다르다. 여기에서 진행될 실천에 관한 몇가지 고찰은 니체적 발상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한 시도이며, 글쓰기에 대한 니체적 인식과 그 실천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진술은 글쓰기와 실천의 문제들과 관련되어진 부정과 회의 이후 발생하는, 공백의 상태를 직시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영감을 제공해줄 수 있다. 보잘 것 없는 언어의 기술로써 진행되는 이 글쓰기는 결국 선행되어진 연구들의 재언, 첨언의 의미로밖에는 남질 못하겠지만, 니체의 지적대로 사상과 관련된 언어의 기술 작업은 무의미한 기호들의 조합과 구성행위로 인해 은폐되어지는 글쓰기 주체의 정념을 그 과정 안에서 드러내면서 관찰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 또한 그렇게 읽혀지기를 바라며 들어가고자 한다.

1.

먼저 다소 비관적인 뉘앙스로써 글쓰기를 부당행위로 간주하고자 한다. 여기엔 과학적 글쓰기, 고백적 글쓰기, 감상적 글쓰기, 해설적 글쓰기, 예언적 글쓰기 등이 포함될 것이며, 오로지 인공적 글쓰기만을 부당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한다. 여기서 고찰하고자 하는 글쓰기의 부당함의 요소 곳곳에 파편적으로 내재한 혹은 우리 자신에 내재된 개선과 구제의 운명론적 가치들이 온전한 문제인식을 방해하고 있으며, 창조적인 행위로써 설정된 글쓰기(이상적 동기에 의존하면서, 지극히 현명한 처세술을 통해 충동들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양태로서 정의가능한 ‘창조’적인)를 행하는 주체가 단순히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창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쉽게 믿어버림으로써 현시욕구에 종속되어버릴 수 있다. 이것이 일단 이글에서 무모한 가정이 필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 우리를 글쓰기로 유도하는 동기가 지니고 있는 내적 본질이란 것에 대해 그 스스로를 끊임없이 각성시키며 그 의미의 갱신을 계속 필요로 하는 작업은 철저하게 어떤 동기에서 벗어난 인위적이며, 기계적인 글쓰기를 통해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면밀한 방식으로 다듬어진 차이에 의존하고 있다. 즉, 어떤 동기와 관계되고 있는 것과 관계되지 않는 것과의 차이, 당연하게 진행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 분명하게 그 효과가 드러나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 실재가 어떤 것에 의해 대변될 수 있다는 의식과 그것은 허위라 여기는 의식과의 차이, 의미가 지속되어 기억 속에서 보존되기를 바라는 발화와 그렇지 않은 발화의 차이 등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글쓰기에 의한 의식활동의 저변에 항상 가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주체는 이를 알아채지 못함으로써 글쓰기의 목적에 그 의미 자체를 종속시켜버리고, 산출되는 모순을 그 목적의 범주내에서 파악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차이들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이루어진 상태는 곧 모든 가정과 관계, 궤변과 모순, 허위와 기만의 움직임을 어떠한 은폐의 의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어 스스로 발생될 수 있게 하는 상태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어떤 형태로도 나타나지 않으며 설명 또한 용이하지 않다. 이러한 발상은 니체가 니힐리즘과 관계해서 오해받던 방식으로 잘못 인식될 수 있으며, 단지 실천의 맹목적 달성을 위한 작위적 가정에만 그칠 수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구체화될 수 없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글의 결론부에 가서는 이것이 어떠한 방식이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책무를 우리에게 보여해 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동기에서 벗어난 인공적 글쓰기란 것이 가능할까. 분명한 의식적 행위인 인공적 글쓰기에, 더군다나 가장 의식적인 기계적 반응으로써의 글쓰기에 어떠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에서 동기는 오직 한가지 목적을 위해 발생되어야 하며, 또한 모든 동기의 의미를 수렴하는 한가지 동기로써 작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사실상 가능해진다. 자가백신이 병을 유발시킨 모체의 균에서 육종되어 다시 모체로 투여됨으로써 항원으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처럼 인공적 발상의 글쓰기는 암묵적으로 글쓰기 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자기상적 메커니즘에서 발생되어 의도적으로 전이되고 도식화됨으로써 그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며, 그 발상의 운명은 단지 드러냄으로써 임무를 다하고 소멸되어버린다.

2. 글쓰기의 기원에 관하여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니체가 제시한 비극의 탄생 배경과 복잡성은 온전히 글쓰기의 문제와 관계시키는 것이다. 비극은 니체에게선 그의 철학적 성취의 시작점이며, 영원회귀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의 계기이다. 결국 이것은 니체적 발상을 통해 글쓰기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이해가능한 역사성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일 뿐이지, 글쓰기의 모든 문제를 수렴할 수 있는 모체적 상황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판단이 니체적 발상에 의지한다함은 곧 다른 곳에서 끌어온 판단의 선행된 가정이 전혀 불필요함을 뜻하며, 설사 다른 곳에서 도출된 판단이라 하지라도 니체적 사유가 적용됨으로써 그것은 하나의 ‘전환’에 놓이게 된다. 그만큼 니체적 사유는 모든 철학적 사유에 원론적이면서 선행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니체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글쓰기의 기원이 밝혀지지는 않으며 단지 기원에 대한 발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기원이 한가지의 사실로써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겸손한 충고뿐이며, 수많은 시도가 머물다가 사라진 흔적뿐이다. 니체의 계보학의 의미는 결국 지속되는 분류화에 대한 선행된 자각으로써의 불확실성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계보에서 나타난 전사적, 노예적, 성직자적 인간유형의 틀은 힘이라는 설정 안에서 희미하게 흩어져버리면서 인간구조의 최초의 시작점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런 계보학의 종결에서는 결국 환원된 지점에서 다시 구조화의 길에 놓여지게 되지만 이는 어떤 진리에 대한 맹종에 가까운 반성이 아닌 반복되는 동안에 벌어지는 부조리한 사건의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반복적 인식은 니체의 계보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가 있는데, 즉 반복되는 고찰을 통한 유형들의 인식과 사실의 인식은 반복의 수만큼 그대로 갱신되면서 계속되는 중첩에 의해 비로소 다의성이란 것이 획득된다. 그러나 인식상황에 따라 발생된 차이에 의지한 다의성이란 것이 뜻하는 바는 결국 구조적 설정이 낳는 몇가지 해결되지 못한 것들이 잔재된 방식이면서 동시에 선택의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한 변명의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반복에 의한 다의성의 획득은 그것에 의지적 행위가 포함되어야만이 온전히 사실과 관계맺을 수 있는 방식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에게서 반복적 인식은 엄밀한 운명적 선택 안에서 파생된 강력한 자기저항인 것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지속되는 반복만이 진리인식에 대한 허위적 사명감에서 벗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발상이다. 니체 이해에 있어 우리에게 가장 혼돈스러운 것이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니체’와 ‘니체적’인 것과의 차이이다. 니체의 잠언을 통한 분절된 언명의 형태는 철학사의 위치에 놓이게 됨으로써 가장 니체적이면서, 니체적이지 못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니체는 의미가 분절됨으로써, 니체적이 되지만 분절되게 이해됨으로서 니체적이지 못하게 된다. 즉, 니체가 살아온 의미의 장은 철학사에 있어 가장 유동적이며 가장 창조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실제 실현되지 못함으로서, 기존의 형이상학적 토대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겨짐으로서, 니체 사유의 한계를 성급히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언명 - 모든 잠언과 의도된 형이상학적 전략으로서의 구성에 의한 언명 - 은 니체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못했건 니체에 의해서 유일하게 실현된 ‘니체적’인 혼란의 극명한 반영을 그 무엇보다도 잘 실현하고 있다. 모든 언명은 어떠한 가상의 반영이라는 니체의 결론은 니체의 언명행위가 가상이 아닌 것으로 남기위한 필사적이면서 역사적인 전략이라는 사실에 대한 몇가지 해명의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 해명은 기존의 철학에서 진행된 연역, 혹은 귀납 따위의 논리적 혹은 양심적인 성취와 관계된 것이 아닌 가상 본연의 위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그 해명을 의심스럽게 만들며, 여러 판단과 의도들에 의해 왜곡되어 받아들이게 된다. 니체의 해명은 ‘이 사람을 보라’를 통해 가장 비합리적이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어느정도까지는 실현되지만, 니체가 남겨놓은 잠언의 분절적 언명에 의해 그 의도가 불분명해진다. 사실상 니체의 해명은 분명히 실현되지 못했고, 그 의도는 분명히 실패한 것이다. ‘나는 왜 ..한가’라는 자기 질문에 대한 해답은 가장 의식적이면서 명확한 논증 안에 존재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니체의 철학적 체계 안에 온전히 보존되지 못함으로서 약간의 궤변이 섞인 비극적(니체가 의도한 비극적인 것과 상반된)인물의 최후의 광적 언변인 것으로 여거지게 되는 것이다. ‘니체적’이라 함은 곧 이러한 니체의 철학의 운명에 곧바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니체적’이라 함은 한정된 시간 속에 철저히 갇혀버린 니체의 저작에 대해 그가 실제로 실현하지 못한 듯 여거지는 무한한 반복의 굴레 안에 ‘일단은’ 놓여지도록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은 니체가 분명히 했던 언어의 가상적 성격에 니체의 언어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먼저 글쓰기의 가상의 상태에 대해 이해를 해야 될 것이다..

“인간은 두 상태, 즉 꿈과 도취 속에서 실존의 환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비극의 태동의 준비를 꿈에서 시작한다. 니체에게선 ‘꿈과의 유희’는 모든 감정 상에 놓이는 현실원칙의 반영이며 ‘가상의 미광’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감정이 상징으로써 현실의 형식을 유지시킨다. 여기에서 꿈은 도취와 구분되는데, 위의 인용에서 니체는 도취와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실존의 문제와 접하면서 꿈은 도취가 아닌 실존의 허망한 충동을 은폐하는 그리스적 전략이며 유일한 현실적 가치인 것이 된다. 도취는 그런 전략의 현실적 반영의 가장 내밀한 인식에 대한 원초적인 유희방식이며, 진리와 상징의 유희적 상황을 즐기며 ‘무서운 실존에의 충동을 인식하고 동시에 실존에 들어선 모든 것의 지속적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해결방식이 아니며 삶의 방식 또한 아닌 것이다. 니체는 물론 도취적 상태의 돌과 같은 모습에 대해 꿈의 탄생과 그 아름다움을 제시해주며, 꿈과 도취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유희의 교차지점에서 그 긍정적 가치를 발산하지만, 그러나 이는 선취된 의식을 요구한다. 즉 도취의 극도로 날카로운 진리의 감각과 꿈의 실존적 충동의 대립의 설정에 대한 변증법적 접점을 버리고 상호침투된 모체적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이 선취된 의식은 비극의 탄생에 있어 필연적인 인식이지만 가상을 상징화하는 진리충동에 의해 두 지점을 절대 교차할 수 없는 원심력의 가장자리에 존재하게 한다. 물론 그 구심엔 실존이 자리하고 그 주변엔 자연이 존재하지만,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의한 비극은 아직 탄생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꿈은 결여의 상태이다. 그런데 니체는 꿈과 도취의 교차, 화해는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꿈에 의한 비극적 상황의 연출이 가능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취적 상황이 ‘완전히 은폐될 수 없다면’ 차라리 ‘꿈의 탄생’을 통해 진리와 아름다움 사이의 투쟁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서로 만나면서 긍정적인 힘을 마음껏 발산하게 된다.

그러나 비극이 탄생되는 않은 시점에선, ‘실존의 공포와 끔찍함’을 알면서도 감추어놓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꿈은 마치 유희의 방식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게 하는 자기인식의 가장 명확한 방식이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니체가 말한 아폴론적 경고인 ‘너 자신을 알라’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자기인식이다. 거기엔 ‘척도, 한계’가 결여된 왜곡된 낭만주의적 발상이 숨겨져 있다. 꿈은 그 가상적 상황에서 고기를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상황적 인식에만 머문 채 유희가 실존적 방식으로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실존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궁핌함에서 그들의 신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천재적 환상의 상징’들인 그리스신들의 세계는 철저한 신성함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의무나 고행 또는 정신적 종교’가 아닌 ‘삶의 종교’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그리스인의 삶에 대한 본질적 인식의 희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그들 자신도 모르게 신들의 고귀한 유희의 영상에 취해 마치 모든 것이 그것으로 환원되어지는 듯한 가상적 상황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각이 없이 그저 머물러 있음은 곧 자학이며 가상을 포기한 상태이다. 꿈에서 시작된 자기의 가상적 인식은 이러한 신들의 세계에 대한 허구적 환상으로 전이되기 쉽기 때문에 아폴론의 존재에서 지니게 되는 ‘저 부드러운 경계선’이 필요한 것이다. 이 부드러운 경계선은 냉정과 도추가 병존하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와 구분이 된다. 그 부드러움에는 절제와 분노와 불쾌가 공존하면서 신들의 찬란함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바로 아폴론이 지닌 예술정신으로서 보여지는 조형의 힘이다.

“실제로 존립하고 있는 이 고백의 실존을 변용의 거울을 통해 보고, 이 거울로 사발의 여괴인 메두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이는 살 수 있기 위한 그리스적 의지의 천재적 전략이었다.”

여기에서 고백은, 신들의 세계는 결국 그 자신들의 어두운 운명을 ‘광명의 형상’들로 은폐한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형상의 그 예술정신은 궁핀에서 야기되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변용의 거울은 변용된 운명적 가상의 재변용에 의한 자기 반영으로써의 가상적 상황의 연출이며 그것에 대한 응시의 상태만이 비극적 사유의 탄생지점이 되는 것이다. 재변용은 반복되는 상황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며 의미의 자기조작에 대한 긍정을 내포한다. 거울은 결국 모든 상황인식에 대한 스스로 가장 내밀한 곳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가장 철저한 은폐의 방식-거울면의 그 날카로운 단면에서 보여지는 놀라운 광명의 반사능력에 의해 가능한-의 선택으로써 최상의 긍정의 방식인 것이다. 거울을 응시함으로써 반복되는 인식은 물론 구조화의 사명 안에 놓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움, 안정과 향락의 세계를’ 실현하는 실존의 보완으로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거울을 이용해 메두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다시말해 돌로 변하지 않게 자신을 보호하는 것, 즉 “그들을 보면 돌로 변한다”는 무서운 자기인식과 정연함과 진링와 개념에 대한 니체의 경로의 메시지는 단지 도망가라는 탈주의 메시지가 아니라 스스로 대면하여 이중적 과정을 통해 돌이 되는 상태를 가상화하라는 메시지이다. 여기에서 메두사는 인식하는 모든 인간 그 자신이며, 또한 그들의 공포스런 충동이면서 인간의 가상 그 자체이다. 거울에 비친 메두사는 스스로를 돌로 만들면서 결국 그 이중적 갈등의 인식작업을 종결할 수 있으며, 거울을 통해 재변용된 실존충동은 메두사의 희생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철저히 전략이었다는 것, 즉 가장 의식적이며 목적지향적이며 정교하게 선행된 인식이라는 것, 이것이 더할 나위없이 비극의 탄생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단서이다. 이 문장은 거울과 메두사, 변용의 반복과 그것의 전략화에 의해 니체의 비극에 관한 저작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의 단서를 제공해주며, 니체철학이 발산하는 그 최상의 긍정적 사유를 단번에 성취하고 있다.

다시 꿈의 문제로 되돌아와서,

꿈 속에 존재하는 가상적 설정은 실재하는 가상에 대한 선천적인 왜곡과 기만의 본질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기만적 논리의 자기설득과 같다. 테제에 대한 반테제적 방법의 고찰은 가장 타당한 형태의 테제적 방법임을 주장하는 이러한 자기설득은 스스로 그 전이의 목적을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유전적 변이의 상태를 야기시킨다. 변이된 상태는 ‘가상을 경시하는 징후로서의 가면-진리의 기호로서 향유되는’을 쓴 기형의 형상으로서 그것은 언제나 그 가상에서 비롯됨으로써 가상의 유전적 형질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 유전적 상황에 글쓰기의 기원에 대한 맥락이 형성될 수 있다.

글쓰기는 처음 꿈 속에 있는 방황하는 실존의 충동을 고정시켜놓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면 글쓰기의 방식, 언어를 통해 진리충동의 가상적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가상화의 작업은 스스로의 의무에 반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나의 실존적 성향으로서 보여지는 기록의 의지는 - 표상됨으로 인해 그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 의지는 그것이 정신의 조각난 몇가지 추측가능한 이야기들로서 구성됨으로 인해 실존충동- 이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가상충동과 공존하는 면밀한 방식의 생존전략이 되므로 -을 만족시키는 쾌락의 의지와 결별하게 되면서 원위치시킬 수 없는 가식적 환상의 상태로 놓여지게 된다. 그것은 꿈이 타락한 모습이면서 동시에 도취를 갈구하는 명증의 충동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혼란은 글쓰기의 의지가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은 가상과 실존, 디오니소스적 상황과 아폴론적 상황의 면밀한 전략의 구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또한 비극의 정신을 자신 안에서 탄생시키지 못한 채 이러한 몇가지 전략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잡다하게 이용함으로서 야기되는 것이며, 니체적 설정들을 변증법적으로 대치된 설정으로 오인하게 된 상태에서 해결의 방식을 구성하면서 야기되는 것이다. 가상과 유전됨의 사이에서의 어떤 의지적 행위는 바로 글쓰기와 관계되는데 가상이 그대로 인식되지 못한 채 변이된 형태로서 의미생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은, 유전됨 즉 마치 가상의 생물학적 진보로서 인간행위 일반에 실현되는 것으로 보는 역사적 필연의 질서를 갈망하는 인간의 안정과 앎에 대한 근본적 충동이 의지로 발현됨으로서 어쩔 수 없이 도래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아폴론적 조형의 충동이 디오니소스와 결별해 있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임시적 삶의 방편이며, 또한 그와의 만남, 즉 비극의 탄생을 기다리는 번식기의 생물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만남에 의한 탄생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변증법은 가장 치명적인 인식의 장애를 가져온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가상과 진리, 꿈과 도취, 회의와 긍정 등의 대립요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화해하고 상황을 초월하게 되는가에 대해 그 해결방식으로 택하는 니체철학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잘못된 니체연구 중 한가지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칼 야스퍼스의 연구가 있는데, 그는 니체를 다룬 저서에서 니체철학의 특수성에 대한 해석의 요건으로 자기모순, 무한반복, 변증법, 실존을 향하는 충동으로의 전체, 이 네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로 제시하는 자기모순은 니체의 저작들에서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하나에 대한 모순된 여러 의견의 제시로서 이 때문에 어느편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니체를 이용할 수 있으며, 의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의 사유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이며, 그 사유의 졸렬함이 아니라 성실함의 표시라고 해명하면서 이 모순을 필연성의 운명 안에서 그 근원까지 경험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 니체 저작에서 나타나는 무한반복성인데, 니체가 한번이라도 기술한 모든 것은 그의 모든 저작에 그 의미가 지속되고 반복되면서 다양하게 변용되며 그 의미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실재적 변증법은 그의 다양한 사상을 여러 연관성으로 연결시켜주면서, 실존의 공간을 확장시켜줄 수 있다. 네 번째로 니체철학의 실존을 향한 그전체는 질문을 심화시키면서 모든 단계들을 검토하는 실존추구의 자기비판과 열정이며 올바른 명제이해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니체 이해는 오직 한가지를 위한 니체철학의 총체화와 다양한 힘의 작용의 집중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니체 저작의 자기 모순에 대한 지적은 일반적으로 타당할지 모르나 그 필연성에서 근원까지의 경험을 요구하는 것은 니체의 모순적 상황이 지닌 역동저깅며 신랄한 자기의식의 작용을 미리부터 차단하고 있다. 니체적 차이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없이 종합화를 통해 그의 실존존재에 봉사하고자 하며, 차이가 발생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비밀이 숨겨진 세계의 마법과 같은 현상들을 일반화하고자 한다. 이것은 니체의 의미의 차이들이 지니는 무한한 긍정과 생명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인식적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니체의 기술에 대한 전체적 파악을 통한 반복의 인식은 작위적인 설정 안에서 형성된 듯 하다. 즉 니체의 저작들의 연결고리들의 생성 내에서 인식가능한 니체의 조각난 판달들의 구제와 그 변용적 해석으로서 지적되는 무한반복의 발생은, 그러나 전체적 파악 하에서의 변용이라는, 혹은 변용을 통한 전체적 파악이든, 논리적 완성의 발견의 허망한 가정을 전제로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정은 의미의 자생적 다변의 상황에 대한 공격의 메시지이며, 지배층동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전체가 실종을 향해 움직이는 그 설명에 근거해서만이 니체의 명제의 중요성의 순서와 그 성격이 본질성의 정도, 핵심적인가 파생적인가에 대한 구분이 니체를 통해서 도출된다는 주장은 언뜻 니체의 철학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듯 하지만, 그것은 정교한 형태의 니체철학의 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구분은 결코 니체적 발상이 아니며, 니체철학의 구성성격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중요성이나 본질의 정도에 따른 재배치는 물론 니체이해를 위한 인식의 필연적인 단계지만, 그것이 니체철학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야스퍼스의 니체 이해는 실존존재의 달성에 얼마나 부합할 수 있는가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니체의 사유는 모든 실존의 문제로 수렴되는 것으로 단정짓는 듯 하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실존과 니체의 실존은 그 성격상 많은 차이를 내포한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에 대한 선행된 이해가 있어야겠지만, 여기서 보여지는 야스퍼스의 실존은 니체가 말하는 실존과는 다분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니체는 실존을 생명, 삶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투쟁과 같은 것으로 보지만, 야스퍼스는 초월적 존재상정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인식과 인간인식의 최종단계이면서 모든 윤리적 완성의 단계이다.

변증법적 해결, 즉 정립과 반정립에 대한 명확한 인식 속에 이루어진 화해의 단계는 니체의 힘들의 설정, 즉 상호견제적이면서 서로를 지향하는 힘들의 투쟁을 정립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실재적 변증법, 다시말해 움직이는 유동적 변증법은 정립화의 그 재규정의 단계를 극복하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그 역시 실존이 중심에 서 있는 제한된 움직임이다.

들뢰즈는 그의 니체연구에서 니체철학의 반변증법적인 특징을 중시해야 한다고 설명하는데,

거의 설명대로 니체에게서 모든 것은 정립의 상태가 아닌 반정립의 상태, 즉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힘은 다른 종류의 힘’, 혹은 ‘삶은 다른 종류의 삶’과 더불어 동시에 투쟁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말은 즉 니체철학의 모든 대립 -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된 요소들은 그 대립관계 상에서 의미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이 처해있는 운명의 상황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운명의 비결정적 요소를 확인함과 동시에 비결정성과의 투쟁에서 비롯되는 힘들의 상황이 의미를 발산하는 것이다.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한다.”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변증법적인 상황이 재현되는 것은 곧 변증법적 상황의 역전을 통한 인식의 유희의 일부일 뿐이다.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기쁨’, 즉 ‘차이의 향유’ 이것이 니체의 반변증법적인 내용의 핵심인 것이다.

“특히 중요한 하나는 초인이 인간의 변증법적인 입장에 반대하고, 가치전환은 소유의 변증법이나 소외제거의 변증법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과 소유, 소외제거와 같은 일반론적 긍정의 가치들은 곧 스스로 인위적 설정에서 산출된 가치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것의 극복의 단계를 니체가 제시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더 이상 몇가지 규정가능한 선택적 상황에서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 가치를 지니는게 아니라 스스로를 부정하고 동시에 긍정하는 역설적 상황에서의 유희를 통해서만이 그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극복을 달성할 수 있다. 중요한 인간의 삶의 양태는 그렇게 인간의 극복에 의해 가치의 한계에서 벗어나면서 양태와 삶, 생명이 공존하는 세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의 양태는 어떠한가. 결론을 향한 의식적 내달음질, 비판적 고찰에 의한 다른 명제의 도출, 논리적 타당성을 향한 자기규정과 충동의 외면, 역사서적을 통해 획득한 비극의 느낌만으로 - 차라리 자기연민에 가까운- 행하는 고백의 소유욕, 엄밀함을 향한 구조화에 의한 인식상황의 고착화, 가언, 선언으로 가장된 정언판단의 충동, 수사를 통한 지식의 심층화, 타자를 가두어버리는 탁월한 직관력, 그러나 타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글쓰기의 운명의 감수, 혹은 적대적 소통행위, 변증법적 인식이 악용되는 이러한 양태들은 곧 수많은 경험들에 의해 입증된 글쓰기의 긍정적 가치들에서 파생되었다는 가정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계기는 아니더라도 곧 총체적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바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다른것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들뢰즈의 이 말은 니체의 글의 내용이 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긍정의 기능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가늠하여 볼 수 있는 지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해준다. 의지는, 즉 외부에 대한 강력한 소망의 에너지의 발산체로서의 의지는 일반적으로 객체화된 주체성 - 다시말해 니체의 의지는 모든 세계 내에서의 인식적 공간 안에 모든 객체화된 대상은 그 스스로 객체화한 것이 아닌 의식의 지향이 가진 인식의 가상적 설정에 의해 객체화된 것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원한다’는 중복오류적 전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을 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은 ‘모든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차이는 ‘니체적 경험주의’에서 야기되는 ‘실천적 요소’로서 그 차이는 ‘부정, 대립, 모순’의 개념이 아닌, ‘긍정의 공격성’에서 야기된 경험의 현상이며, 현존 자체가 되는 것이다. 공격성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적극적인 현존’의 활동은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해가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다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발생되는 관계들은 곧 ‘다른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이며 이 ‘다른’ 것을 향해있는 의지는 곧 ‘목적, 동기, 대상의 탐구’가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다. 이것은 지속되고 반복되는 자신의 확인이며, 향유인 것이다.

그러나 의지는 글쓰기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발현되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의지행위로서의 글쓰기에 그 스스로가 부여한 책무에 대해 항상 금욕주의적 이상을 상기시키면서, 가장 중요한 반성적 계기를 연상시키면서, 그것에 능동적인 의욕을 불러일으키면서, 현시된 경험으로서 완성시키면서, 다른 고상함을 산출시키는 의지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책무를 수행하면서 그것이 야기된 내용으로서의 자신의 그 행위는 기억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것보다 먼저 우리는 과연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에 대해 그 문제를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구제하고 기억을 구제하였는가. 다시말해, 우리의 의지로서의 행위의 수행은 의지를 스스로 발생시켰으며 그것을 수행하였는가.

“그에게 있어서는 원인이나 결과에 대한 추측을 하는데 있어, 또 그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있다는 믿음을 가지는데 있어, ‘의지’의 느낌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의지와 기억 간의 관계가 전도됨으로써 글쓰기 주체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형상이 발산하는 분위기에 매혹되며 행위는 강력한 힘을 휘두르며 가치의 문제를 결정해버리고 만다. 기억은 항상 의지에 선행된다. 그러나 의지는 항상 기억위에 상정된다. 그럼으로써 의지의 발현으로서의 행위는 기억에 대해 명령조의 조작과 왜곡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경험된 행위는 그 자체로 현시됨으로써, 단지 그 이유만으로 기억을 압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다. 의지의 느낌만이 우리의 행위에 윤리성에 대한 사상을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스스로 형성된 윤리성은 그 느낌의 낭만적 감수성을 자극하면서 기억을 손쉽게 변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는 기억의 흔적으로서의 혹은 기억의 발산으로서의 행위는 순수하게 다시 기억으로 조용히 환원가능하게 되는가. 행위는 어떠한 경로로 경험되고 그 의미가 형성되어 어떠한 경로로, 어떠한 체취를 통해 되돌아와 인식되는가. 이것에 대한 명시적 분명한 해답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 낼 수 있는 혐의들을 외면하여서는 안된다. 기억은 단지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현상의 문제이다. 즉, 기억은 쾌, 불쾌의 대립관계 상이 선택적인 역량과 관계된 것이 아닌 발생하는 현상에 대한 유보되는, 지연되는 태도와 관계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기억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움직임이 유지되고 거기에 스스로 집착하는 기억의 성향이 증명해준다. 현상이 언제나 중립적이며 미결정의 상태로 설명될 수 있다면, 기억 또한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피할 수 없는 사실이 가로막는데, 기억이 단지 좋고 나쁨 사이의 선택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기억은 일종의 선택임과 동시에 고정성과 관계된 것임은 분명하다. 이 대립된 양자가 어떻게 기억의 조건으로서 형성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전치시켜, 이 대립된 양자가 어떻게 의지의 조건으로서 형성될 수 있을 것인가.

3. 이 사람을 보라.

여기에서 ‘사람’은 니체 자신을 뜻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모든 방식을 수렴하고 있는 모든 이로서의 ‘사람’인 것이며, 제한된 견해들의 상호견제적인 힘들의 갈등상황에서 야기되는 모든 ‘사람’의 규정들을 포함한다. 또한 ‘사람’을 이해시키는 것, ‘사람’을 설명하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변용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사람’으로 수렴되며 지향되는 모든 동기인 것이다. ‘사람’을 봐야만 하는 의무는 모든 인간의 ‘사람’과 관계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인식이며 ‘사람’을 망각하지 않고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이다. 거기엔 ‘사람’이 언어로서 형성될 수 있는 모든 이해가능한 상황이 포함되어 있어야만 하며, 이제까지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보존된 모든 ‘사람’의 형상이 담겨있어야만 가능한 사람의 ‘사람’으로서의 자기설명의 완전함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지속되는 기억됨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향한 의지가 발생되며, 그것은 사람의 삶 중 하루의 시작이 된다. ‘사람’에 대한 끝없는 지향이 여기에 포함되며, 생명에 대한 탐구가 포함된다. 니체의 자기해명은 완전하게 결백한 경지로 향해있는 어떤 의무를 가지고 저술되었다. 즉 그의 저작들이 처한 이중적 모순과 경계를 넘어선 직관, 역사를 거역하는 자기응시와 정착하지 않는 말하기의 불안한 상황을 해명하기 위하여,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 사람을 보라>는 저술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결백한 것은 자기의 저작들이 야기시키는 모든 임의적, 자기보상적 이해의 상황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감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이 글을 보라>와 동일하지만, 그러나 거기엔 몇 가지 역전되는 관계가 존재한다. 니체는 자신을 이해시키는 데에 자신의 글을 이용하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그 글과 동일하지 않다. ‘나와 내 작품은 동일하지 않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에서 그의 설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의 수많은 경험과 세월을 통해 기록된 그의 글들은 그의 목적과 동기와 의도에서 떠나있으면서, 그의 의도를 포함하는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통해 그는 그 어떤 글도 그 자신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곧 글이 남겨놓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경험과 그의 의식일 뿐이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읽혀짐은 단지 그의 의지가 외부로 발현된 흔적의 상황적 지각일 뿐이지, 결코 ‘사람’인 니체가 읽혀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분명한 자기인식의 과정 속에 존재하는 가상과의 투쟁에서 벌어지는 놀이의 규칙들에 대한 기록일 뿐인 것이다. 글을 통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선 무엇을 원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경고한다. 또한 글을 가능한 경험의 상태로 변환하여 읽는 습관은 독서 중 가장 악랄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글을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인식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방식만을 재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반대로 역전되어 그의 글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의지와 그의 동기를 읽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엔 고도로 의도된 인식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으며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의 글을 이해한 것이 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그 숨겨진 인식의 가능성을 읽기 위해선 글의 영역에서 확장되어 나가서 니체 그 자신을 이해해야 하며 그와 밀착해서 그의 행보를 따라야 하지만, 그것은 그의 글을 통해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니체의 글을 통해 그 글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니체는 그의 글들을 통해 니체 자신에게 오는 길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글의 이해를 통해서는 불가능 한 것이다.

여기엔 면밀하게 의도된 설정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가 끝까지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가상의 실현은 가상의 경험을 통해서도 불가능하며 가상적 인식을 통해서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전환에 놓임으로서 가능한데 그 전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이 사는 세계 내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글 또한 마찬가지이다. 글은 자신의 정신을 대변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의지의 완전한 반영에 의해 자신의 기억과의 완전한 조우를 위해 존재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글이 최초로 존재하게 되는 그 시점부터 불가능한 것이 된다. 여기엣 오로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이며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지향이다. 그의 글을 읽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모호함과 자기모순, 임의적인 설정과 염세적인 한탄, 과잉의 직관과 파편적인 논조는 그 독서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있는데, 독자의 이해방식을 그의 글쓰기의 방식에 합당하도록 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는 이해함을 그의 임의성, 우연성, 작위성, 파편성의 성격에 합당하도록 자신의 인식의 틀을 변형시키면서, 나름의 니체관을 그리면서 독서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이해방식은 독자의 새로운 인식방법의 획득이 아닌 자신 안에 내재된 그 임의성, 우연성 따위의 본질적 성향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된다. 이것이 니체의 글의 유일한 이해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그의 사상의 핵심을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보라>는 위에서 설명한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니체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면서, 니체로 향해있는 우리의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들뢰즈가 ‘반응적 허무주의’로서 설명하고 있는 인간의 현상에 대한 자기 반응적 권리로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필연성에 묶여 있는 부조리한 운명, 진리를 향해있는 가상적 인식과 그 자신의 원리를 망각하고자 하는 생존욕구는 저 밑에 있는 ‘얼음’속에서 감추어진 채 영원히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작동하면서 곧바로 인간이 반응을 야기시키는 모든 삶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의지의 부정, 즉 완전한 부정, 완전히 박탈된 상황 하에서 반응하는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자시인식의 최후의 생존력이며 삶의 열정이다. 거기엔 아무런 동기도 없으며, 아무런 보상의식도 없다. <이 사람을 보라>의 해명의 목적과 정당함에 대한 충동은 그러나, 니체사상의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허무적 인식의 가장 극명한 형태의 표출로서 보여진다. 왜냐하면 니체의 저술에 대한 이와같은 규정 속에 내포되어 있는 자기한정의 임무는 자신이 그전까지 지속해온 모든 사상에 대한 전복적 충동이면서, 동시에 그 실천인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저술들은 그러므로 니체 자신에게는 실존 자체는 아니었으며 다만 그 지속이 수단이면서 전환의 수단이었음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사람을 보라>는 그 니체 자신의 그 자신에 대한 최후의 반응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부정의 징후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이 사람을 보라>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해명적 논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보다는 그 스스로의 자기현상에 대한 몇 가지 해석적 전망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그 자신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글쓰기의 모든 현상들이 그 동기, 목적, 내용, 사상 등의 모든 의지들과 함께 부정의 형태로서 펼쳐지는 진리와 가상 사이의 투쟁의 장 속에서 최후의 완전한 자기인식을 통해 모든 전환의 계기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모든 부정의 인식이 긍정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하지만, 그 긍정은 부정이 완전히 제거된 현상이 아니라 부정이 이중적으로 작용함으로서 하나의 실존에 대한 순환되는 경험의 굴레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중부정의 굴레는 삶에서의 굴레가 아니라 그의 진리를 향해있는 가상 속에서의 인식에 대한 부정의 굴레로서 남아있게 된다. 그것은 인식의 부정고 그 빈 공간에서의 허무적 현상에 대한 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남아있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지향과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 완전한 부정, 삶에 선험되는 완전한 부정, 완전한 자기인식이라는 것은 곧 그에게 주어진 이전과 이후의 삶에 대한 망각적 인식이 현상으로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니체적 자기인식의 종결로서 나타날지 모른다. 부정이 삶 속의 투쟁들의 징후로서 보여진다 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부정의 길은 그 외관의 제한을 허락하지 않으며, 같은 것을 반복해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의 흔적은 무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의 전환으로서의 긍정은 이 부정의 자리를 부정을 통하여 다시 되돌려놓음으로서 인식 속에서 삶을 구제하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의 내용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부정들을 행하는 자로서 설명되어지며 결국 <이 사람을 보라>는 그 수단을 명시화하는 도구로서 니체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흩어지는 모든 저서들의 행보를, 그리고 거기에 남아있는 니체 자신을 위해, 삶을 위해, 긍정으로서 조직화하고 재배치하며 그것들 사이를 관류하는 니체자신의 의지를 생산해내는, 오직 한가지 동기로만 수렴되는 복잡한 의지들의 자기확인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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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헤어조그

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



온갖 색깔의 진정성들과 유토피아적 잔상들, 이미 엔딩을 찾은 스토리들로 가득차 있을 것만 같았던

그 곳이, 이 세상의 가장 너저분하고 번잡하며 자극적인 상.들의 최종 집결지와 같다는 것.

정화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상.들의 또다른 타임라인 위에 있다는 것.


사람은 목표로 한것을 얻었다면 바로 멈출 줄을 알아야 된다는 것.


진화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욕망과 그 적응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환경에 대한 두려움의

회피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과학은 신화,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진보한다



단세포 생물만으로, 지능.의 정의가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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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최초일 것이다.

이 정도로 비평적 논쟁의 여지나, 호불호의 진흙탕에서 완벽히 벗어나서

단 0.1%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 동시대에서 단 하나의 최고가 되어버리는 사운드는,

애니멀 콜렉티브가 정말 처음일 것이다.


역사적 복제와 환영의 복잡한 장면연출의 딜레마에서 유연하게 빠져나가고

지엽적인 태도설정의 요구에서 벗어나고,

정말 지독할 정도로 운명적으로 쫓아다니던 인물론.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눌러버리면서

새 시대에 대한 끔찍한 스토리 텔링을 처음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게 한

최초의 사운드이다.


사실 이전 앨범까지는 0.5% 정도의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Merriweather Post Pavilion 에서 완벽해졌다.


예전, 만약 내가 90년대 초, 10대 중반이던 때에 Autechre 나 Aphex Twin 의 음악을 동시대로써

경험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한탄을 했었는데.. 지금은 바로 그 이상의 지대이다.


이 동시대를 그냥 흘러 보내면 아마 두번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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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코 2009/07/03 00:33      
완전 동감!
Animal collective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게 너무 행복한 1인.


오래되고 어설픈 교서에서는,

"보수는 교활하게 귀결되고, 진보는 무구한 전사로 귀결된다. 그래서 대부분 보수가 유리하다"


밝은흑색, - 혹은 진보의 카운터파트, 뭐가 됐든, - 와 뿌연깃발- 혹은 보수의 카운터 파트, 저멀리 - 간의 차이는

이곳에서는 너무 과도하게 극명하다.

옛날 진보는 전사.로 비유됐지만 지금 진보는 이미 패전병이었다.

오래된 역사와 몇년전 추억에서 무언가 증명해줄 꺼리들을 찾고만 있다가, 부리나케 놀래서 튀어나간다.

밝은흑색에서 오래되고 치밀하게 준비된 무언가를 던지면, 뿌연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며 펜과 연장을 준비한다.

그러나 뿌연깃발은 언제나 자신들이 거기에서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고 믿는다.

밝은흑색이 슬그머니 교서를 교정하며 고개를 내밀면, 뿌연깃발은 살짝 비켜서서 어찌하는지 지켜보다가 펜과 연장을

준비한다.

밝은흑색은 사건을 조정하며 사건간을 서로 연결시켜놓고 슬그머니 내려놓고 준비하다가 던진다.

뿌연깃발은 연결되어진 사건 타래들을 풀려고 애쓰다가 그냥 엉뚱한 모양새로만 끝내버리고.. 그렇게 당황하다가

결국 최후의 수단이 바로  상징적 제스처.이다. 뿌연깃발은 결국 상징적 제스처만을 믿는다.

밝은흑색이 플랜B를 준비하면, 뿌연깃발은 대안.을 준비하지 못한다. 사실 대안.Alternative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쩐지 더 뿌옇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족스럽지 못하단다.

밝은흑색이 지질학적 진화의 효과를 드디어 맛보는 순간, 뿌연깃발은 실천.하지 못한다. 아니 실천의 범주를 잘못 설정한다

저 곳에 무언가를 던져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안다. 차라리 실천학.이라도 만들어서 정당성을 되짚어보는 구차한 선비노릇이

약간 더 건설적인데 말이다.


환원.과 환원오류.와 환원오류의지.때문이다.

뿌연깃발은 우선 가치설정을 하고 세계관을 확립하려하고, 그 다음 전략과 실천계획을 수립하려 한다. 그런데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의 실타래를 건네 받으면서 무언가 잘못되어버리는 것을 느끼면서, 저 순서의 오류를 수정할 기회를 놓쳐버린다.

그리고 드디어, 도덕.을 외친다. 이것이 환원.이다.

그런데, 그 도덕이 역사가 증명하고, 경험이 증명하며, 가치가 지지하는 도덕의 계보서.에서 기원한거라 믿고선 규범을

설정해버린다. 그리고 행태유형을 정의하면서 행동유형과 착각한다. 이것이 환원오류.이다

그리고...... 뿌연깃발의 주변부들이 이 글을 보면서 뿌연깃발.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환원오류의지.이다. ( 이것은 절대 자유의지가 아니다 )


그래서 젠장. 저 재미있는 감상적 음모론이나 숙덕거리고 있고, 상징적 제스처만 취하면 얇은 천으로 둘러싸인

저 규범규격.에 대한 허가서를 받을 줄 알고 있고, 시끄럽게 떠들면 그게 무언가 실천적 행태의 전초단계가 되어줄 것으로만

착각하고 있고, 약간의 성노가 내일 출근길의 고귀한 양식이며 그게 곧 진정한 대안.을 창조.해나갈 훌륭한 밑거름인 양 믿고

있거나, 아니면 그래도 무언가 사소한 거라도 지탱해줄 거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정말로. 아니라면, 정말로 이러한 것들이 저 밝은흑색을 더 밝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만한다.


더 무구해질수록 전사.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정체성을 찾기위한 방법으로 교활함.을 택해버릴 수 있다.

이건 저 오래되고 어설픈 교서가 유일하게 담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이건 우연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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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의 몇 고개를 넘으면서, 수천시간을 다시 되돌려 그때의 지긋지긋한 기억에서 배운 것을 지워버리고,

진이 다 빠진채 지나가는 상도동길.


여름바람.때문이라면.

이제 긴 여름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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