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글쓰기를 위한 예비고찰로서
글쓰기에 대한 니체적 반성과 발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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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것이 다시한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에 가로놓일 것이다”
“너! 위대한 천체여! 만약 너의 빛을 흠뻑 쬐는 자들이 없다면 너는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말은 시작될 ‘문제인식’에 관한 것, 거기에 종속된 어떤 숙명적인 임무, 회의로써 진행되는 질문들과 악의 섞인 비웃음,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오류와 폐단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규약조직... ‘실천’안에서 단계적으로 지위를 차지하는 이러한 사항들과의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말하기, 남기기, 전달하기, 기억시키기의 몇 가지 의식행위와 그 의식을 통해 가치상정의 기회를 찾는 의식에 대해 문제인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가 뜻했던 대로 종교적 현상과 탐구행위와는 다른 문제이며 일상에서의 경험과 인식의 문제와도 또한 다르다. 여기에서 진행될 실천에 관한 몇가지 고찰은 니체적 발상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한 시도이며, 글쓰기에 대한 니체적 인식과 그 실천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진술은 글쓰기와 실천의 문제들과 관련되어진 부정과 회의 이후 발생하는, 공백의 상태를 직시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영감을 제공해줄 수 있다. 보잘 것 없는 언어의 기술로써 진행되는 이 글쓰기는 결국 선행되어진 연구들의 재언, 첨언의 의미로밖에는 남질 못하겠지만, 니체의 지적대로 사상과 관련된 언어의 기술 작업은 무의미한 기호들의 조합과 구성행위로 인해 은폐되어지는 글쓰기 주체의 정념을 그 과정 안에서 드러내면서 관찰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 또한 그렇게 읽혀지기를 바라며 들어가고자 한다.
1.
먼저 다소 비관적인 뉘앙스로써 글쓰기를 부당행위로 간주하고자 한다. 여기엔 과학적 글쓰기, 고백적 글쓰기, 감상적 글쓰기, 해설적 글쓰기, 예언적 글쓰기 등이 포함될 것이며, 오로지 인공적 글쓰기만을 부당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한다. 여기서 고찰하고자 하는 글쓰기의 부당함의 요소 곳곳에 파편적으로 내재한 혹은 우리 자신에 내재된 개선과 구제의 운명론적 가치들이 온전한 문제인식을 방해하고 있으며, 창조적인 행위로써 설정된 글쓰기(이상적 동기에 의존하면서, 지극히 현명한 처세술을 통해 충동들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양태로서 정의가능한 ‘창조’적인)를 행하는 주체가 단순히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창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쉽게 믿어버림으로써 현시욕구에 종속되어버릴 수 있다. 이것이 일단 이글에서 무모한 가정이 필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 우리를 글쓰기로 유도하는 동기가 지니고 있는 내적 본질이란 것에 대해 그 스스로를 끊임없이 각성시키며 그 의미의 갱신을 계속 필요로 하는 작업은 철저하게 어떤 동기에서 벗어난 인위적이며, 기계적인 글쓰기를 통해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면밀한 방식으로 다듬어진 차이에 의존하고 있다. 즉, 어떤 동기와 관계되고 있는 것과 관계되지 않는 것과의 차이, 당연하게 진행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 분명하게 그 효과가 드러나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 실재가 어떤 것에 의해 대변될 수 있다는 의식과 그것은 허위라 여기는 의식과의 차이, 의미가 지속되어 기억 속에서 보존되기를 바라는 발화와 그렇지 않은 발화의 차이 등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글쓰기에 의한 의식활동의 저변에 항상 가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주체는 이를 알아채지 못함으로써 글쓰기의 목적에 그 의미 자체를 종속시켜버리고, 산출되는 모순을 그 목적의 범주내에서 파악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차이들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이루어진 상태는 곧 모든 가정과 관계, 궤변과 모순, 허위와 기만의 움직임을 어떠한 은폐의 의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어 스스로 발생될 수 있게 하는 상태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어떤 형태로도 나타나지 않으며 설명 또한 용이하지 않다. 이러한 발상은 니체가 니힐리즘과 관계해서 오해받던 방식으로 잘못 인식될 수 있으며, 단지 실천의 맹목적 달성을 위한 작위적 가정에만 그칠 수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구체화될 수 없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글의 결론부에 가서는 이것이 어떠한 방식이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책무를 우리에게 보여해 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동기에서 벗어난 인공적 글쓰기란 것이 가능할까. 분명한 의식적 행위인 인공적 글쓰기에, 더군다나 가장 의식적인 기계적 반응으로써의 글쓰기에 어떠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에서 동기는 오직 한가지 목적을 위해 발생되어야 하며, 또한 모든 동기의 의미를 수렴하는 한가지 동기로써 작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사실상 가능해진다. 자가백신이 병을 유발시킨 모체의 균에서 육종되어 다시 모체로 투여됨으로써 항원으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처럼 인공적 발상의 글쓰기는 암묵적으로 글쓰기 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자기상적 메커니즘에서 발생되어 의도적으로 전이되고 도식화됨으로써 그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며, 그 발상의 운명은 단지 드러냄으로써 임무를 다하고 소멸되어버린다.
2. 글쓰기의 기원에 관하여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니체가 제시한 비극의 탄생 배경과 복잡성은 온전히 글쓰기의 문제와 관계시키는 것이다. 비극은 니체에게선 그의 철학적 성취의 시작점이며, 영원회귀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의 계기이다. 결국 이것은 니체적 발상을 통해 글쓰기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이해가능한 역사성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일 뿐이지, 글쓰기의 모든 문제를 수렴할 수 있는 모체적 상황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판단이 니체적 발상에 의지한다함은 곧 다른 곳에서 끌어온 판단의 선행된 가정이 전혀 불필요함을 뜻하며, 설사 다른 곳에서 도출된 판단이라 하지라도 니체적 사유가 적용됨으로써 그것은 하나의 ‘전환’에 놓이게 된다. 그만큼 니체적 사유는 모든 철학적 사유에 원론적이면서 선행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니체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글쓰기의 기원이 밝혀지지는 않으며 단지 기원에 대한 발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기원이 한가지의 사실로써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겸손한 충고뿐이며, 수많은 시도가 머물다가 사라진 흔적뿐이다. 니체의 계보학의 의미는 결국 지속되는 분류화에 대한 선행된 자각으로써의 불확실성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계보에서 나타난 전사적, 노예적, 성직자적 인간유형의 틀은 힘이라는 설정 안에서 희미하게 흩어져버리면서 인간구조의 최초의 시작점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런 계보학의 종결에서는 결국 환원된 지점에서 다시 구조화의 길에 놓여지게 되지만 이는 어떤 진리에 대한 맹종에 가까운 반성이 아닌 반복되는 동안에 벌어지는 부조리한 사건의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반복적 인식은 니체의 계보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가 있는데, 즉 반복되는 고찰을 통한 유형들의 인식과 사실의 인식은 반복의 수만큼 그대로 갱신되면서 계속되는 중첩에 의해 비로소 다의성이란 것이 획득된다. 그러나 인식상황에 따라 발생된 차이에 의지한 다의성이란 것이 뜻하는 바는 결국 구조적 설정이 낳는 몇가지 해결되지 못한 것들이 잔재된 방식이면서 동시에 선택의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한 변명의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반복에 의한 다의성의 획득은 그것에 의지적 행위가 포함되어야만이 온전히 사실과 관계맺을 수 있는 방식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에게서 반복적 인식은 엄밀한 운명적 선택 안에서 파생된 강력한 자기저항인 것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지속되는 반복만이 진리인식에 대한 허위적 사명감에서 벗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발상이다. 니체 이해에 있어 우리에게 가장 혼돈스러운 것이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니체’와 ‘니체적’인 것과의 차이이다. 니체의 잠언을 통한 분절된 언명의 형태는 철학사의 위치에 놓이게 됨으로써 가장 니체적이면서, 니체적이지 못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니체는 의미가 분절됨으로써, 니체적이 되지만 분절되게 이해됨으로서 니체적이지 못하게 된다. 즉, 니체가 살아온 의미의 장은 철학사에 있어 가장 유동적이며 가장 창조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실제 실현되지 못함으로서, 기존의 형이상학적 토대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겨짐으로서, 니체 사유의 한계를 성급히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언명 - 모든 잠언과 의도된 형이상학적 전략으로서의 구성에 의한 언명 - 은 니체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못했건 니체에 의해서 유일하게 실현된 ‘니체적’인 혼란의 극명한 반영을 그 무엇보다도 잘 실현하고 있다. 모든 언명은 어떠한 가상의 반영이라는 니체의 결론은 니체의 언명행위가 가상이 아닌 것으로 남기위한 필사적이면서 역사적인 전략이라는 사실에 대한 몇가지 해명의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 해명은 기존의 철학에서 진행된 연역, 혹은 귀납 따위의 논리적 혹은 양심적인 성취와 관계된 것이 아닌 가상 본연의 위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그 해명을 의심스럽게 만들며, 여러 판단과 의도들에 의해 왜곡되어 받아들이게 된다. 니체의 해명은 ‘이 사람을 보라’를 통해 가장 비합리적이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어느정도까지는 실현되지만, 니체가 남겨놓은 잠언의 분절적 언명에 의해 그 의도가 불분명해진다. 사실상 니체의 해명은 분명히 실현되지 못했고, 그 의도는 분명히 실패한 것이다. ‘나는 왜 ..한가’라는 자기 질문에 대한 해답은 가장 의식적이면서 명확한 논증 안에 존재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니체의 철학적 체계 안에 온전히 보존되지 못함으로서 약간의 궤변이 섞인 비극적(니체가 의도한 비극적인 것과 상반된)인물의 최후의 광적 언변인 것으로 여거지게 되는 것이다. ‘니체적’이라 함은 곧 이러한 니체의 철학의 운명에 곧바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니체적’이라 함은 한정된 시간 속에 철저히 갇혀버린 니체의 저작에 대해 그가 실제로 실현하지 못한 듯 여거지는 무한한 반복의 굴레 안에 ‘일단은’ 놓여지도록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은 니체가 분명히 했던 언어의 가상적 성격에 니체의 언어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먼저 글쓰기의 가상의 상태에 대해 이해를 해야 될 것이다..
“인간은 두 상태, 즉 꿈과 도취 속에서 실존의 환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비극의 태동의 준비를 꿈에서 시작한다. 니체에게선 ‘꿈과의 유희’는 모든 감정 상에 놓이는 현실원칙의 반영이며 ‘가상의 미광’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감정이 상징으로써 현실의 형식을 유지시킨다. 여기에서 꿈은 도취와 구분되는데, 위의 인용에서 니체는 도취와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실존의 문제와 접하면서 꿈은 도취가 아닌 실존의 허망한 충동을 은폐하는 그리스적 전략이며 유일한 현실적 가치인 것이 된다. 도취는 그런 전략의 현실적 반영의 가장 내밀한 인식에 대한 원초적인 유희방식이며, 진리와 상징의 유희적 상황을 즐기며 ‘무서운 실존에의 충동을 인식하고 동시에 실존에 들어선 모든 것의 지속적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해결방식이 아니며 삶의 방식 또한 아닌 것이다. 니체는 물론 도취적 상태의 돌과 같은 모습에 대해 꿈의 탄생과 그 아름다움을 제시해주며, 꿈과 도취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유희의 교차지점에서 그 긍정적 가치를 발산하지만, 그러나 이는 선취된 의식을 요구한다. 즉 도취의 극도로 날카로운 진리의 감각과 꿈의 실존적 충동의 대립의 설정에 대한 변증법적 접점을 버리고 상호침투된 모체적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이 선취된 의식은 비극의 탄생에 있어 필연적인 인식이지만 가상을 상징화하는 진리충동에 의해 두 지점을 절대 교차할 수 없는 원심력의 가장자리에 존재하게 한다. 물론 그 구심엔 실존이 자리하고 그 주변엔 자연이 존재하지만,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의한 비극은 아직 탄생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꿈은 결여의 상태이다. 그런데 니체는 꿈과 도취의 교차, 화해는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꿈에 의한 비극적 상황의 연출이 가능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취적 상황이 ‘완전히 은폐될 수 없다면’ 차라리 ‘꿈의 탄생’을 통해 진리와 아름다움 사이의 투쟁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서로 만나면서 긍정적인 힘을 마음껏 발산하게 된다.
그러나 비극이 탄생되는 않은 시점에선, ‘실존의 공포와 끔찍함’을 알면서도 감추어놓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꿈은 마치 유희의 방식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게 하는 자기인식의 가장 명확한 방식이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니체가 말한 아폴론적 경고인 ‘너 자신을 알라’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자기인식이다. 거기엔 ‘척도, 한계’가 결여된 왜곡된 낭만주의적 발상이 숨겨져 있다. 꿈은 그 가상적 상황에서 고기를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상황적 인식에만 머문 채 유희가 실존적 방식으로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실존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궁핌함에서 그들의 신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천재적 환상의 상징’들인 그리스신들의 세계는 철저한 신성함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의무나 고행 또는 정신적 종교’가 아닌 ‘삶의 종교’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그리스인의 삶에 대한 본질적 인식의 희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그들 자신도 모르게 신들의 고귀한 유희의 영상에 취해 마치 모든 것이 그것으로 환원되어지는 듯한 가상적 상황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각이 없이 그저 머물러 있음은 곧 자학이며 가상을 포기한 상태이다. 꿈에서 시작된 자기의 가상적 인식은 이러한 신들의 세계에 대한 허구적 환상으로 전이되기 쉽기 때문에 아폴론의 존재에서 지니게 되는 ‘저 부드러운 경계선’이 필요한 것이다. 이 부드러운 경계선은 냉정과 도추가 병존하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와 구분이 된다. 그 부드러움에는 절제와 분노와 불쾌가 공존하면서 신들의 찬란함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바로 아폴론이 지닌 예술정신으로서 보여지는 조형의 힘이다.
“실제로 존립하고 있는 이 고백의 실존을 변용의 거울을 통해 보고, 이 거울로 사발의 여괴인 메두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이는 살 수 있기 위한 그리스적 의지의 천재적 전략이었다.”
여기에서 고백은, 신들의 세계는 결국 그 자신들의 어두운 운명을 ‘광명의 형상’들로 은폐한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형상의 그 예술정신은 궁핀에서 야기되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변용의 거울은 변용된 운명적 가상의 재변용에 의한 자기 반영으로써의 가상적 상황의 연출이며 그것에 대한 응시의 상태만이 비극적 사유의 탄생지점이 되는 것이다. 재변용은 반복되는 상황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며 의미의 자기조작에 대한 긍정을 내포한다. 거울은 결국 모든 상황인식에 대한 스스로 가장 내밀한 곳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가장 철저한 은폐의 방식-거울면의 그 날카로운 단면에서 보여지는 놀라운 광명의 반사능력에 의해 가능한-의 선택으로써 최상의 긍정의 방식인 것이다. 거울을 응시함으로써 반복되는 인식은 물론 구조화의 사명 안에 놓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움, 안정과 향락의 세계를’ 실현하는 실존의 보완으로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거울을 이용해 메두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다시말해 돌로 변하지 않게 자신을 보호하는 것, 즉 “그들을 보면 돌로 변한다”는 무서운 자기인식과 정연함과 진링와 개념에 대한 니체의 경로의 메시지는 단지 도망가라는 탈주의 메시지가 아니라 스스로 대면하여 이중적 과정을 통해 돌이 되는 상태를 가상화하라는 메시지이다. 여기에서 메두사는 인식하는 모든 인간 그 자신이며, 또한 그들의 공포스런 충동이면서 인간의 가상 그 자체이다. 거울에 비친 메두사는 스스로를 돌로 만들면서 결국 그 이중적 갈등의 인식작업을 종결할 수 있으며, 거울을 통해 재변용된 실존충동은 메두사의 희생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철저히 전략이었다는 것, 즉 가장 의식적이며 목적지향적이며 정교하게 선행된 인식이라는 것, 이것이 더할 나위없이 비극의 탄생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단서이다. 이 문장은 거울과 메두사, 변용의 반복과 그것의 전략화에 의해 니체의 비극에 관한 저작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의 단서를 제공해주며, 니체철학이 발산하는 그 최상의 긍정적 사유를 단번에 성취하고 있다.
다시 꿈의 문제로 되돌아와서,
꿈 속에 존재하는 가상적 설정은 실재하는 가상에 대한 선천적인 왜곡과 기만의 본질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기만적 논리의 자기설득과 같다. 테제에 대한 반테제적 방법의 고찰은 가장 타당한 형태의 테제적 방법임을 주장하는 이러한 자기설득은 스스로 그 전이의 목적을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유전적 변이의 상태를 야기시킨다. 변이된 상태는 ‘가상을 경시하는 징후로서의 가면-진리의 기호로서 향유되는’을 쓴 기형의 형상으로서 그것은 언제나 그 가상에서 비롯됨으로써 가상의 유전적 형질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 유전적 상황에 글쓰기의 기원에 대한 맥락이 형성될 수 있다.
글쓰기는 처음 꿈 속에 있는 방황하는 실존의 충동을 고정시켜놓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면 글쓰기의 방식, 언어를 통해 진리충동의 가상적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가상화의 작업은 스스로의 의무에 반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나의 실존적 성향으로서 보여지는 기록의 의지는 - 표상됨으로 인해 그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 의지는 그것이 정신의 조각난 몇가지 추측가능한 이야기들로서 구성됨으로 인해 실존충동- 이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가상충동과 공존하는 면밀한 방식의 생존전략이 되므로 -을 만족시키는 쾌락의 의지와 결별하게 되면서 원위치시킬 수 없는 가식적 환상의 상태로 놓여지게 된다. 그것은 꿈이 타락한 모습이면서 동시에 도취를 갈구하는 명증의 충동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혼란은 글쓰기의 의지가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은 가상과 실존, 디오니소스적 상황과 아폴론적 상황의 면밀한 전략의 구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또한 비극의 정신을 자신 안에서 탄생시키지 못한 채 이러한 몇가지 전략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잡다하게 이용함으로서 야기되는 것이며, 니체적 설정들을 변증법적으로 대치된 설정으로 오인하게 된 상태에서 해결의 방식을 구성하면서 야기되는 것이다. 가상과 유전됨의 사이에서의 어떤 의지적 행위는 바로 글쓰기와 관계되는데 가상이 그대로 인식되지 못한 채 변이된 형태로서 의미생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은, 유전됨 즉 마치 가상의 생물학적 진보로서 인간행위 일반에 실현되는 것으로 보는 역사적 필연의 질서를 갈망하는 인간의 안정과 앎에 대한 근본적 충동이 의지로 발현됨으로서 어쩔 수 없이 도래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아폴론적 조형의 충동이 디오니소스와 결별해 있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임시적 삶의 방편이며, 또한 그와의 만남, 즉 비극의 탄생을 기다리는 번식기의 생물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만남에 의한 탄생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변증법은 가장 치명적인 인식의 장애를 가져온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가상과 진리, 꿈과 도취, 회의와 긍정 등의 대립요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화해하고 상황을 초월하게 되는가에 대해 그 해결방식으로 택하는 니체철학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잘못된 니체연구 중 한가지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칼 야스퍼스의 연구가 있는데, 그는 니체를 다룬 저서에서 니체철학의 특수성에 대한 해석의 요건으로 자기모순, 무한반복, 변증법, 실존을 향하는 충동으로의 전체, 이 네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로 제시하는 자기모순은 니체의 저작들에서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하나에 대한 모순된 여러 의견의 제시로서 이 때문에 어느편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니체를 이용할 수 있으며, 의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의 사유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이며, 그 사유의 졸렬함이 아니라 성실함의 표시라고 해명하면서 이 모순을 필연성의 운명 안에서 그 근원까지 경험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 니체 저작에서 나타나는 무한반복성인데, 니체가 한번이라도 기술한 모든 것은 그의 모든 저작에 그 의미가 지속되고 반복되면서 다양하게 변용되며 그 의미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실재적 변증법은 그의 다양한 사상을 여러 연관성으로 연결시켜주면서, 실존의 공간을 확장시켜줄 수 있다. 네 번째로 니체철학의 실존을 향한 그전체는 질문을 심화시키면서 모든 단계들을 검토하는 실존추구의 자기비판과 열정이며 올바른 명제이해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니체 이해는 오직 한가지를 위한 니체철학의 총체화와 다양한 힘의 작용의 집중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니체 저작의 자기 모순에 대한 지적은 일반적으로 타당할지 모르나 그 필연성에서 근원까지의 경험을 요구하는 것은 니체의 모순적 상황이 지닌 역동저깅며 신랄한 자기의식의 작용을 미리부터 차단하고 있다. 니체적 차이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없이 종합화를 통해 그의 실존존재에 봉사하고자 하며, 차이가 발생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비밀이 숨겨진 세계의 마법과 같은 현상들을 일반화하고자 한다. 이것은 니체의 의미의 차이들이 지니는 무한한 긍정과 생명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인식적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니체의 기술에 대한 전체적 파악을 통한 반복의 인식은 작위적인 설정 안에서 형성된 듯 하다. 즉 니체의 저작들의 연결고리들의 생성 내에서 인식가능한 니체의 조각난 판달들의 구제와 그 변용적 해석으로서 지적되는 무한반복의 발생은, 그러나 전체적 파악 하에서의 변용이라는, 혹은 변용을 통한 전체적 파악이든, 논리적 완성의 발견의 허망한 가정을 전제로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정은 의미의 자생적 다변의 상황에 대한 공격의 메시지이며, 지배층동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전체가 실종을 향해 움직이는 그 설명에 근거해서만이 니체의 명제의 중요성의 순서와 그 성격이 본질성의 정도, 핵심적인가 파생적인가에 대한 구분이 니체를 통해서 도출된다는 주장은 언뜻 니체의 철학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듯 하지만, 그것은 정교한 형태의 니체철학의 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구분은 결코 니체적 발상이 아니며, 니체철학의 구성성격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중요성이나 본질의 정도에 따른 재배치는 물론 니체이해를 위한 인식의 필연적인 단계지만, 그것이 니체철학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야스퍼스의 니체 이해는 실존존재의 달성에 얼마나 부합할 수 있는가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니체의 사유는 모든 실존의 문제로 수렴되는 것으로 단정짓는 듯 하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실존과 니체의 실존은 그 성격상 많은 차이를 내포한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에 대한 선행된 이해가 있어야겠지만, 여기서 보여지는 야스퍼스의 실존은 니체가 말하는 실존과는 다분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니체는 실존을 생명, 삶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투쟁과 같은 것으로 보지만, 야스퍼스는 초월적 존재상정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인식과 인간인식의 최종단계이면서 모든 윤리적 완성의 단계이다.
변증법적 해결, 즉 정립과 반정립에 대한 명확한 인식 속에 이루어진 화해의 단계는 니체의 힘들의 설정, 즉 상호견제적이면서 서로를 지향하는 힘들의 투쟁을 정립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실재적 변증법, 다시말해 움직이는 유동적 변증법은 정립화의 그 재규정의 단계를 극복하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그 역시 실존이 중심에 서 있는 제한된 움직임이다.
들뢰즈는 그의 니체연구에서 니체철학의 반변증법적인 특징을 중시해야 한다고 설명하는데,
거의 설명대로 니체에게서 모든 것은 정립의 상태가 아닌 반정립의 상태, 즉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힘은 다른 종류의 힘’, 혹은 ‘삶은 다른 종류의 삶’과 더불어 동시에 투쟁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말은 즉 니체철학의 모든 대립 -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된 요소들은 그 대립관계 상에서 의미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이 처해있는 운명의 상황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운명의 비결정적 요소를 확인함과 동시에 비결정성과의 투쟁에서 비롯되는 힘들의 상황이 의미를 발산하는 것이다.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한다.”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변증법적인 상황이 재현되는 것은 곧 변증법적 상황의 역전을 통한 인식의 유희의 일부일 뿐이다.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기쁨’, 즉 ‘차이의 향유’ 이것이 니체의 반변증법적인 내용의 핵심인 것이다.
“특히 중요한 하나는 초인이 인간의 변증법적인 입장에 반대하고, 가치전환은 소유의 변증법이나 소외제거의 변증법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과 소유, 소외제거와 같은 일반론적 긍정의 가치들은 곧 스스로 인위적 설정에서 산출된 가치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것의 극복의 단계를 니체가 제시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더 이상 몇가지 규정가능한 선택적 상황에서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 가치를 지니는게 아니라 스스로를 부정하고 동시에 긍정하는 역설적 상황에서의 유희를 통해서만이 그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극복을 달성할 수 있다. 중요한 인간의 삶의 양태는 그렇게 인간의 극복에 의해 가치의 한계에서 벗어나면서 양태와 삶, 생명이 공존하는 세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의 양태는 어떠한가. 결론을 향한 의식적 내달음질, 비판적 고찰에 의한 다른 명제의 도출, 논리적 타당성을 향한 자기규정과 충동의 외면, 역사서적을 통해 획득한 비극의 느낌만으로 - 차라리 자기연민에 가까운- 행하는 고백의 소유욕, 엄밀함을 향한 구조화에 의한 인식상황의 고착화, 가언, 선언으로 가장된 정언판단의 충동, 수사를 통한 지식의 심층화, 타자를 가두어버리는 탁월한 직관력, 그러나 타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글쓰기의 운명의 감수, 혹은 적대적 소통행위, 변증법적 인식이 악용되는 이러한 양태들은 곧 수많은 경험들에 의해 입증된 글쓰기의 긍정적 가치들에서 파생되었다는 가정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계기는 아니더라도 곧 총체적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바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다른것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들뢰즈의 이 말은 니체의 글의 내용이 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긍정의 기능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가늠하여 볼 수 있는 지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해준다. 의지는, 즉 외부에 대한 강력한 소망의 에너지의 발산체로서의 의지는 일반적으로 객체화된 주체성 - 다시말해 니체의 의지는 모든 세계 내에서의 인식적 공간 안에 모든 객체화된 대상은 그 스스로 객체화한 것이 아닌 의식의 지향이 가진 인식의 가상적 설정에 의해 객체화된 것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원한다’는 중복오류적 전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을 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은 ‘모든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차이는 ‘니체적 경험주의’에서 야기되는 ‘실천적 요소’로서 그 차이는 ‘부정, 대립, 모순’의 개념이 아닌, ‘긍정의 공격성’에서 야기된 경험의 현상이며, 현존 자체가 되는 것이다. 공격성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적극적인 현존’의 활동은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해가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다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발생되는 관계들은 곧 ‘다른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이며 이 ‘다른’ 것을 향해있는 의지는 곧 ‘목적, 동기, 대상의 탐구’가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다. 이것은 지속되고 반복되는 자신의 확인이며, 향유인 것이다.
그러나 의지는 글쓰기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발현되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의지행위로서의 글쓰기에 그 스스로가 부여한 책무에 대해 항상 금욕주의적 이상을 상기시키면서, 가장 중요한 반성적 계기를 연상시키면서, 그것에 능동적인 의욕을 불러일으키면서, 현시된 경험으로서 완성시키면서, 다른 고상함을 산출시키는 의지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책무를 수행하면서 그것이 야기된 내용으로서의 자신의 그 행위는 기억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것보다 먼저 우리는 과연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에 대해 그 문제를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구제하고 기억을 구제하였는가. 다시말해, 우리의 의지로서의 행위의 수행은 의지를 스스로 발생시켰으며 그것을 수행하였는가.
“그에게 있어서는 원인이나 결과에 대한 추측을 하는데 있어, 또 그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있다는 믿음을 가지는데 있어, ‘의지’의 느낌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의지와 기억 간의 관계가 전도됨으로써 글쓰기 주체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형상이 발산하는 분위기에 매혹되며 행위는 강력한 힘을 휘두르며 가치의 문제를 결정해버리고 만다. 기억은 항상 의지에 선행된다. 그러나 의지는 항상 기억위에 상정된다. 그럼으로써 의지의 발현으로서의 행위는 기억에 대해 명령조의 조작과 왜곡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경험된 행위는 그 자체로 현시됨으로써, 단지 그 이유만으로 기억을 압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다. 의지의 느낌만이 우리의 행위에 윤리성에 대한 사상을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스스로 형성된 윤리성은 그 느낌의 낭만적 감수성을 자극하면서 기억을 손쉽게 변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는 기억의 흔적으로서의 혹은 기억의 발산으로서의 행위는 순수하게 다시 기억으로 조용히 환원가능하게 되는가. 행위는 어떠한 경로로 경험되고 그 의미가 형성되어 어떠한 경로로, 어떠한 체취를 통해 되돌아와 인식되는가. 이것에 대한 명시적 분명한 해답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 낼 수 있는 혐의들을 외면하여서는 안된다. 기억은 단지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현상의 문제이다. 즉, 기억은 쾌, 불쾌의 대립관계 상이 선택적인 역량과 관계된 것이 아닌 발생하는 현상에 대한 유보되는, 지연되는 태도와 관계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기억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움직임이 유지되고 거기에 스스로 집착하는 기억의 성향이 증명해준다. 현상이 언제나 중립적이며 미결정의 상태로 설명될 수 있다면, 기억 또한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피할 수 없는 사실이 가로막는데, 기억이 단지 좋고 나쁨 사이의 선택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기억은 일종의 선택임과 동시에 고정성과 관계된 것임은 분명하다. 이 대립된 양자가 어떻게 기억의 조건으로서 형성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전치시켜, 이 대립된 양자가 어떻게 의지의 조건으로서 형성될 수 있을 것인가.
3. 이 사람을 보라.
여기에서 ‘사람’은 니체 자신을 뜻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모든 방식을 수렴하고 있는 모든 이로서의 ‘사람’인 것이며, 제한된 견해들의 상호견제적인 힘들의 갈등상황에서 야기되는 모든 ‘사람’의 규정들을 포함한다. 또한 ‘사람’을 이해시키는 것, ‘사람’을 설명하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변용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사람’으로 수렴되며 지향되는 모든 동기인 것이다. ‘사람’을 봐야만 하는 의무는 모든 인간의 ‘사람’과 관계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인식이며 ‘사람’을 망각하지 않고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이다. 거기엔 ‘사람’이 언어로서 형성될 수 있는 모든 이해가능한 상황이 포함되어 있어야만 하며, 이제까지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보존된 모든 ‘사람’의 형상이 담겨있어야만 가능한 사람의 ‘사람’으로서의 자기설명의 완전함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지속되는 기억됨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향한 의지가 발생되며, 그것은 사람의 삶 중 하루의 시작이 된다. ‘사람’에 대한 끝없는 지향이 여기에 포함되며, 생명에 대한 탐구가 포함된다. 니체의 자기해명은 완전하게 결백한 경지로 향해있는 어떤 의무를 가지고 저술되었다. 즉 그의 저작들이 처한 이중적 모순과 경계를 넘어선 직관, 역사를 거역하는 자기응시와 정착하지 않는 말하기의 불안한 상황을 해명하기 위하여,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 사람을 보라>는 저술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결백한 것은 자기의 저작들이 야기시키는 모든 임의적, 자기보상적 이해의 상황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감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이 글을 보라>와 동일하지만, 그러나 거기엔 몇 가지 역전되는 관계가 존재한다. 니체는 자신을 이해시키는 데에 자신의 글을 이용하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그 글과 동일하지 않다. ‘나와 내 작품은 동일하지 않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에서 그의 설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의 수많은 경험과 세월을 통해 기록된 그의 글들은 그의 목적과 동기와 의도에서 떠나있으면서, 그의 의도를 포함하는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통해 그는 그 어떤 글도 그 자신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곧 글이 남겨놓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경험과 그의 의식일 뿐이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읽혀짐은 단지 그의 의지가 외부로 발현된 흔적의 상황적 지각일 뿐이지, 결코 ‘사람’인 니체가 읽혀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분명한 자기인식의 과정 속에 존재하는 가상과의 투쟁에서 벌어지는 놀이의 규칙들에 대한 기록일 뿐인 것이다. 글을 통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선 무엇을 원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경고한다. 또한 글을 가능한 경험의 상태로 변환하여 읽는 습관은 독서 중 가장 악랄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글을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인식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방식만을 재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반대로 역전되어 그의 글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의지와 그의 동기를 읽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엔 고도로 의도된 인식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으며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의 글을 이해한 것이 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그 숨겨진 인식의 가능성을 읽기 위해선 글의 영역에서 확장되어 나가서 니체 그 자신을 이해해야 하며 그와 밀착해서 그의 행보를 따라야 하지만, 그것은 그의 글을 통해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니체의 글을 통해 그 글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니체는 그의 글들을 통해 니체 자신에게 오는 길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글의 이해를 통해서는 불가능 한 것이다.
여기엔 면밀하게 의도된 설정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가 끝까지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가상의 실현은 가상의 경험을 통해서도 불가능하며 가상적 인식을 통해서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전환에 놓임으로서 가능한데 그 전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이 사는 세계 내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글 또한 마찬가지이다. 글은 자신의 정신을 대변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의지의 완전한 반영에 의해 자신의 기억과의 완전한 조우를 위해 존재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글이 최초로 존재하게 되는 그 시점부터 불가능한 것이 된다. 여기엣 오로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이며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지향이다. 그의 글을 읽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모호함과 자기모순, 임의적인 설정과 염세적인 한탄, 과잉의 직관과 파편적인 논조는 그 독서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있는데, 독자의 이해방식을 그의 글쓰기의 방식에 합당하도록 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는 이해함을 그의 임의성, 우연성, 작위성, 파편성의 성격에 합당하도록 자신의 인식의 틀을 변형시키면서, 나름의 니체관을 그리면서 독서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이해방식은 독자의 새로운 인식방법의 획득이 아닌 자신 안에 내재된 그 임의성, 우연성 따위의 본질적 성향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된다. 이것이 니체의 글의 유일한 이해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그의 사상의 핵심을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보라>는 위에서 설명한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니체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면서, 니체로 향해있는 우리의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들뢰즈가 ‘반응적 허무주의’로서 설명하고 있는 인간의 현상에 대한 자기 반응적 권리로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필연성에 묶여 있는 부조리한 운명, 진리를 향해있는 가상적 인식과 그 자신의 원리를 망각하고자 하는 생존욕구는 저 밑에 있는 ‘얼음’속에서 감추어진 채 영원히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작동하면서 곧바로 인간이 반응을 야기시키는 모든 삶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의지의 부정, 즉 완전한 부정, 완전히 박탈된 상황 하에서 반응하는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자시인식의 최후의 생존력이며 삶의 열정이다. 거기엔 아무런 동기도 없으며, 아무런 보상의식도 없다. <이 사람을 보라>의 해명의 목적과 정당함에 대한 충동은 그러나, 니체사상의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허무적 인식의 가장 극명한 형태의 표출로서 보여진다. 왜냐하면 니체의 저술에 대한 이와같은 규정 속에 내포되어 있는 자기한정의 임무는 자신이 그전까지 지속해온 모든 사상에 대한 전복적 충동이면서, 동시에 그 실천인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저술들은 그러므로 니체 자신에게는 실존 자체는 아니었으며 다만 그 지속이 수단이면서 전환의 수단이었음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사람을 보라>는 그 니체 자신의 그 자신에 대한 최후의 반응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부정의 징후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이 사람을 보라>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해명적 논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보다는 그 스스로의 자기현상에 대한 몇 가지 해석적 전망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그 자신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글쓰기의 모든 현상들이 그 동기, 목적, 내용, 사상 등의 모든 의지들과 함께 부정의 형태로서 펼쳐지는 진리와 가상 사이의 투쟁의 장 속에서 최후의 완전한 자기인식을 통해 모든 전환의 계기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모든 부정의 인식이 긍정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하지만, 그 긍정은 부정이 완전히 제거된 현상이 아니라 부정이 이중적으로 작용함으로서 하나의 실존에 대한 순환되는 경험의 굴레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중부정의 굴레는 삶에서의 굴레가 아니라 그의 진리를 향해있는 가상 속에서의 인식에 대한 부정의 굴레로서 남아있게 된다. 그것은 인식의 부정고 그 빈 공간에서의 허무적 현상에 대한 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남아있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지향과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 완전한 부정, 삶에 선험되는 완전한 부정, 완전한 자기인식이라는 것은 곧 그에게 주어진 이전과 이후의 삶에 대한 망각적 인식이 현상으로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니체적 자기인식의 종결로서 나타날지 모른다. 부정이 삶 속의 투쟁들의 징후로서 보여진다 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부정의 길은 그 외관의 제한을 허락하지 않으며, 같은 것을 반복해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의 흔적은 무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의 전환으로서의 긍정은 이 부정의 자리를 부정을 통하여 다시 되돌려놓음으로서 인식 속에서 삶을 구제하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의 내용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부정들을 행하는 자로서 설명되어지며 결국 <이 사람을 보라>는 그 수단을 명시화하는 도구로서 니체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흩어지는 모든 저서들의 행보를, 그리고 거기에 남아있는 니체 자신을 위해, 삶을 위해, 긍정으로서 조직화하고 재배치하며 그것들 사이를 관류하는 니체자신의 의지를 생산해내는, 오직 한가지 동기로만 수렴되는 복잡한 의지들의 자기확인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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